[신왕오천축국전] 45.오대산의 찬란한 낙조

신 왕오 천축국전 별곡 45

2007-10-06     김규현

문수보살의 성지, 오대산(五臺山)

스승이던 불공삼장이 병마로 쓰러져 입적하게 되자 문득 무상을 느꼈다. 혜초 사문은 자신의 육신을 돌이켜보니, 이미 자신도 5만 리를 걸어서 천축을 순례했던 철인 같았던 젊은이가 벌써 아니었다. 이제는 자기도 회향을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장안에서의 오랜 생활을 정리하고는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마지막 길은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닭울음소리 들리는 그의 고향 계림(鷄林)은 노구의 혜초에게는 너무 멀고 아득하였다. 미물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중생들의 본성이라 했지만, 이미 세계정신을 초월한 고승 혜초에게는 육신의 고향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780년, 마침내 혜초는 오대산으로 향했다. 장안에서 오대산은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오대산으로 향하는 한가로운 길 위에서 혜초는 문득 천축을 순례했던 일과 장안에서 보낸 반세기란 긴 세월을 회상해 보았다.

한때는 스승인 불공삼장을 모시고 황제가 사는 대명궁(大明宮)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만백성의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아니 그 때보다도 혜초 자신이 대종(代宗)의 칙명으로 선유사(仙遊寺)에서 황제 대신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때가 더욱 영광스러웠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7일간 계속된 기도 끝에 마침내 비단 같은 감로수가 마른하늘에서 내려왔을 때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오대산은 중국대륙 북동쪽의 산시성[山西省]에 있는 명산으로 3천m 급의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도교(道敎)에 의하여 개산(開山)되었으나 5세기 후반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에 의하여 불광사(佛光寺)와 청량사(淸凉寺) 등이 세워짐으로써 중국의 4대 불교성지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특히 오대산은 문수(文殊)보살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수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는 화엄사상이나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주존으로 하는 밀교에서 모두 비중이 큰 보살이다. 지혜의 상징인 문수는 실천을 강조하는 보현(普賢)보살과 항상 대비되는 역할로 설정되고 있다. 법당에서도 가운데에서 우주를 상징하는 권인(拳印)을 쥔 비로자나불의 좌우에서 보현과 문수는 나란히 서 있는 형상으로 배치되는데, 이는 ‘앎과 행동’이 둘이 아닌 대승불교의 이상적 덕목을 상징한 것으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 것을 경계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화엄경』에 의하면 청량산은 문수보살의 상주처인데, 그 산이 바로 오대산과 동일시한 데서부터 오대산의 문수도량화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또한 혜초에게 오대산은 불공삼장을 비롯한 많은 도반들과의 인연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그렇기에 불공의 제자들이 오대산에서 수행을 했으리라는 추정을 한결 설득력이 있게 만든다. 그 때 아마도, 혜초는 스승을 수행하며 도반들과 함께 오대산을 들락거렸을 것이기에, 인생의 회향을 앞둔 노쇠한 혜초 사문의 발길은 누가 잡아끄는 것이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오대산 쪽으로 향했다.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의 낙조

기록상으로 혜초 스님은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하셨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이 곳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다. 필자도 님의 자취를 따라 5만 리를 좇아 오대산까지 왔지만, 역시 님의 입적처는 찾을 수 없었다.

님의 희미한 체취라도 찾을 생각으로 하루 종일 오대산을 쏘다니다보니 피곤함이 밀려와 잠시 나무에 기대어 있다가, 문득 한 줄기 소슬바람에 정신을 차려서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오대산 중대봉(中臺峰) 뒤로 벌써 붉은 해가 넘어가고 있었는데, 높은 산에는 저녁 해가 유난히 빠른 탓인지 이윽고 찬란한 노을이 물들기 시작되면서 음영이 짙은 땅거미가 빠르게 옆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평생을 경전번역에 헌신했던 혜초 자신에게도 문수보살은 주존(主尊)이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붙잡고 있었던 소의경전의 주인공이 바로 문수이기 때문이다. 밀교경전은 대개 이름이 너무 길고 또 불존상(佛尊像)도 많아 어렵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제목을 한참 읽다보면 이것이 본문인지 제목인지가 헷갈릴 정도로 길고 난해하다. 그러나 요령을 가지고 가지치기를 하면 오히려 간단하게 실체가 드러난다.

혜초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경전의 이름도 그렇다. 원명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것이지만, 이 길고 난해해 보이는 제목에서 수식어를 줄이면 만주실리(曼珠實利)가 남는다. 이 말은 바로 문수의 산스크리트 이름인 만주슈리(Majushri), 즉 문수이니 이 경전이 문수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는 당연하다. 그러니까 혜초는 자기의 생을 회향하기 위해서, 자기 영혼을 주존인 문수에게 의탁하기 위해서 오대산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힘들게 오대산에 도착한 혜초는 ‘건원보리사’라는 암자에다 짐을 풀었다. 그리고 780년 4월, 혜초는 다시 역경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마침 그 곳에 오래 전에 번역했던 약칭 『천발대교왕경』이라는 경전이 있었기에 그것을 다시 필사(筆寫)하고는 게송(偈頌)을 지어서 서문(序文)을 붙이는 작업이었다.

혜초는 그 일이 자기의 마지막 일대사라는 것을 알고 심혈을 기울였다. 약칭 그 『천발대교왕경』은 스승 금강지로부터 전수받은 이래 50년의 세월 동안 참구하여 번역하고 마침내 그 서문까지 손수 지었던 것이니, 어찌 보면 그 경은 밀교승 혜초의 사상적 원천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긴 이름의 경전에다 문수사상을 집약해서 설명하고는 손수 마지막 유촉을 다음과 같이 적어 넣었다.

“여래께서 문수보살에게 부촉하시니 비밀법이 널리 퍼짐에 걸림이 없네.
만다라(曼茶羅)와 관정(灌頂)으로 모든 여래께서 이마에다 대신 수기(授記)를 주시네.
천 개의 팔과 천 개의 발우(鉢盂)를 가진 문수보살의 연꽃 법회에서는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굳은 경지를 일체 중생에게 나누어 주시는구나.”
이렇듯 마지막 불사를 끝내놓은 어느 하루, 혜초 사문은 아침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한 승복으로 갈아입고서 가사장삼을 수하고는 백옥으로 만든 사자(獅子)를 타고 마중 나오신 문수보살의 손을 잡고서 영원한 니르바나로 떠나가셨다.
명왕진언(明王眞言) “옴 마니 반메 훔”을 염하면서, 가릉빈가의 미묘한 노래 소리가 들리는, 항상 연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다는 그 곳, 그 적멸의 세계로 떠나가셨다.

그 날 오대산 다섯 봉우리에는 찬란한 노을이 붉게 타올랐고, 밤에는 마치 오로라 같은 방광(放光)이 온 산을 환하게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