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불광」 창간 30주년 그 의미

월간 「불광」 창간 30주년 그 의미

2007-10-06     관리자

월간 「불광」이 창간 30년을 맞았다. 「불광」보다 역사가 더 길고 더 유명한 잡지도 있지만 「불광」의 탄생과 성장만큼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잡지는 찾기 힘들 것이다.
「불광」은 단순한 언론 매체가 아니라 시대를 계도하는 선구자였으며, 진리에 목마른 지식인들의 아카데미였다. 무엇보다 「불광」의 주장과 ‘말씀’은 책갈피 속을 나와 현실이 되었다. 조직이 먼저 만들어지고 매체가 뒤를 잇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인 반면, 「불광」은 책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뒤 독자 중심으로 ‘불광법회’가 만들어졌다. 이어 불광사가 생겼으므로 「불광」은 불광법회와 불광사의 모태인 셈이다.
한국불교사에서 잡지의 독자들이 모임을 만들고 사찰까지 창건한 예는 「불광」이 유일하다. 물론 「불광」 창간호가 나오기 두 달 전인 1974년 9월 1일 ‘불광회’가 조직됐지만 이 단체의 유일한 목적이 「불광」 창간이었기 때문에 「불광」 탄생이 갖는 의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불광」 30년을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74년 9월 1일 불광회가 창립되고 이어 11월 1일 월간 「불광」 창간호가 나온다. 78쪽 짜리 4×6판인 이 조그마한 책은 출간과 더불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독자들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
지금껏 알고 있는 불교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불교는 나이 많은 어머니, 할머니들이 복을 비는 정도로만 여겼다. 불교를 무속과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많은 때였다. 하지만 「불광」에 실린 불교는 이와는 전혀 달랐다. 당시 창간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령을 싣고 있다. “순수불교에 의거한 인간정신의 정립과 가치의 구현에 기여한다. 인간을 불행에 빠트리고 있는 일체 정신적 독소를 제거하고 본연인간의 개현을 추구한다. 구원생명의 존엄과 신성을 존중하고 그 권위와 가치를 보장할 사회적 이념을 개발한다.”
「불광」이 개인의 참된 가치 구현과 더불어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 물질적 사회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사회인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강령에 담겨있다.
「불광」의 강령은 이후 충실하게 견지해왔다. 창간 1주년 기념 사상강연회를 계기로 법회 창립이 구체화 되어 1975년 10월 16일 대각사에서 불광법회가 창립법회를 열었다. 한국불교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하나의 잡지를 구독하는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법회를 조직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신행운동과 신사상을 내세운 결사체였다. 광덕 스님은 43명의 보현행자들 앞에서 이런 요지의 법문을 했다. “불광은 행동을 통하여 인간본성의 무한성을 소리 높이 외쳤지만 그것은 아직 지상을 통한 절규 밖을 넘지 못했다. 이제 몇 명 형제들의 노력으로 우선 주1회의 법회를 갖기로 했다. 이 모임이 불광을 우리의 심신에 체달하는 데 힘있는 도량이 되기를 염원한다.”
불광법회는 놀라운 속도로 불어났다. 첫 법회에 참가한 43명은 1년 뒤 10배가 넘는 480명으로 늘어났다. 무엇보다 회원들의 면면이 다른 사찰 법회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직장인, 자영업자, 전문직 종사자, 대학생, 군인, 주부. 초로의 부인만이 불교신자인 줄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불광법회는 충격을 던졌다.
이들을 법당으로 끌어들인 것은 「불광」이었다. 그 속에는 교리문답이나 포교전략에 관한 특집기사, 경전 해석 등이 들어있었다. 오늘날 모든 매체가 싣는 이 기획은 「불광」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경봉 스님, 성철 스님, 일타 스님, 불교한글화를 이끈 스승 운허 스님과 대강백 고산 스님, 지관 스님, 그리고 조명기·양주동 박사·서정주 시인·이종익·이숭녕·황수영·이기영·김용운 박사가 불광 초기 필진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장안의 지가’를 끌어올릴 ‘고급필자’들인데 「불광」은 이들을 한꺼번에 모신 것이다.
두 번 다시 만들기 힘든 최강의 필진이 참여하는 잡지가 대중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불가사의한 일일 것이다. 불광의 대 약진에 힘입어 드디어 1982년 10월 24일 잠실에 불광사를 마련한다. 불광이 창간된 지 불과 8년 만에 불광회의 근본도량이 생긴 것이다. 불광사가 창건되면서 잡지도 함께 발전한다.
「불광」 창간 초기만 해도 사무실이 없어 대각사 골방을 빌어쓰고 인쇄는 광덕 스님의 신도였던 신흥인쇄 박충일 회장에게 신세를 져야 했다. 원고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늘 다음 호가 제대로 나올지 마음 졸이며 보내야 했다. 불광사의 창건은 이 같은 어려운 사정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80년대 들어 「불광」은 편집에도 신경을 기울여 사진을 대폭 사용하는 등 컬러시대에 걸맞는 잡지로 탈바꿈한다.
또 「불광」에 실렸던 주옥 같은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 불광출판사의 시대로 함께 연다. 13년간이나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던, 교계 최초의 만화 ‘달공거사’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1990년대는 인쇄 매체의 판도가 뒤바뀌는 시대다. 20세기 초부터 언론을 선도해오던 잡지가 신문에 그 자리를 내주던 시기가 바로 1990년대다. 「불광」 역시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광덕 스님이 주창하고 실천했던 밝고 희망찬 불교, 대중에게 다가가는 불교, 현대화된 불교는 서울을 중심으로 널리 확산됐다.
불광사와 같은 조직과 신행체계를 갖춘 사찰이 강남에만 수도 없이 생겨났다. 이미 불교계를 대표하던 몇몇 잡지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불광」보다 역사가 오래됐던 한 잡지는 정간하는 아픔을 맞는 등 잡지들의 어려움은 계속됐다. 하지만 「불광」은 달랐다.
초창기의 주옥 같은 글은 여전히 빛을 발했으며, 시대의 흐름에 맞춰 환경과 수행 캠페인을 펼치고 어린이·청소년·장애인 문제에 대해서도 불교적 시각으로 해법을 제시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연관스님의 ‘선의 고전’ 등 불교 교리도 한층 강화됐다. ‘신행수기 공모’, ‘전국 어린이 부처님 그림 그리기 대회’ 등 지금껏 인기리에 실시하고 있는 사업이 이 시기에 시작됐다.
1999년에는 인터넷 웹진을 개설, 불교의 온라인 시대를 열었다. 『광덕 스님 명상언어집』, 『두문을 동시에 투과하다』, 『반야심경 강의』, 『보현행원품강의』, 『선문단련설』 등 「불광」에 연재됐던 글은 단행본으로 출간돼 지금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창간 30주년을 맞은 지금 「불광」 역시 마하반야바라밀 사상을 토대로 ‘순수불교’, ‘본연인간’, ‘구원생명’의 강령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광」이 한국 현대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은둔적 소극적 기복적 불교 풍토를 혁신하는 선구자였으며, 해방 후 최초의 도심포교당을 건립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불광」이 창간될 때 당시 사회는 급격한 도시화·현대화로 인해 사회는 급격한 정신 공황에 빠져있었다. 이를 선도해야 할 민족종교인 불교는 오랜 분규로 인해 자신의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지쳐있었다. 불교 역시 급변하는 사회에 휩쓸려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때였다.
이 때 광덕 스님이 “법의 등불을 밝혀 스스로 밝아지고 이웃도 밝혀서 모두가 법의 주인이 되고 존엄한 인간주체가 되자”는 ‘바라밀 운동’을 주창한다. 갈 길을 몰라 헤매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월간 「불광」이다.
광덕 스님은 열반에 들었지만 스님이 만들고 키운 「불광」은 여전히 하늘의 태양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