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44. 혜초의 장안에서의 50년 세월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44

2007-10-06     김규현

불경 번역의 양대 산실, 천복사(薦福寺)와 대흥선사(大興善寺)

혜초 사문을 따라 오만 리를 돌고 돌아 장안에 도착한 ‘해동의 나그네’에게 당면한 관심사는 ‘혜초는 서역에서 돌아와 첫날 어디에다 여장을 풀었을까?’라는 의문일 것이다. 나그네라면 하루 밤의 잠자리는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니까.

그 대답은 이렇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혜초는 그가 서역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스승의 인연을 맺었던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와 불공삼장을 찾았을 것이며, 그렇지 않아도 번역자가 부족했던 두 역경승은 이미 인도 말 실력이 능숙해진 혜초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객방에 따듯한 잠자리를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당시 두 스승은 천복사(薦福寺)와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혜초의 장안에서의 시발점은 이 두 사원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현재 이 두 사원은 그 자리에 아직도 건재하다. 다만, 승려들이 없는 사원이라기보다 초라한 관광지로 변한 채 소안탑을 중심으로 한 큰 구획 안에 이웃해 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만, 당시는 완전히 구분된 웅장했던 국찰(國刹)이었다.

현재 장안의 양대 명물의 하나인 소안탑은 대안탑에 비해서 조금 작기 때문에 소안탑(小雁塔)이라고 불렀다지만,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장중하고 또한 아름답다. 이 탑은, 현장 법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구법승 의정(義淨)이 천축에서 많은 경전을 가지고 돌아오자 그 경전을 보관하고 이를 번역하기 위한 세워졌다. 처음에는 15층탑이었으나 지진으로 2층이 무너지고 상륜(相輪)도 없어져서 지금은 13층, 약 43m가 남아 있다. 대안탑이 남성적인 데 비해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장안성 남동쪽 교외에는 고종(高宗)이 죽은 모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자은사(慈恩寺)가 있었는데, 현장 법사가 천축에서 많은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자 7층 전탑(塼塔)인 대안탑(大雁塔)을 지어 보관하고는 거국적으로 역경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이 두 사찰을 중심으로, 특히 밀교는 대흥선사와 천복사를 중심으로 ‘번경원(潼經院)’이라는 역경소를 설치하여 번역사업을 펴나갔다. 수(隋)나라 때 세워진 나랏절이었던 대흥선사는 당대에 들어와서도 위치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혜초 사문도 천복사와 대흥선사를 거점으로 활동을 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혜초의 스승인 금강지는 선무외(善無畏)와 더불어 중국 밀교(密敎)의 개조(開祖)로 꼽히는 인물로, 720년 배를 타고 중원으로 들어와서는 이르는 곳마다 단을 쌓고 관정의식을 베풀고 『금강정경(金剛頂經)』 등의 경전을 번역하여 밀교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금강지가 천복사에 머물며 번역을 할 당시 우리의 혜초가 장안에서는 처음으로 약칭 『대교왕경서(大乘瑜伽千鉢大敎王經序)』를 통해 개원 21년(733)이란 기년(紀年)이 적힌 글을 직접 저술한다. 그가 천축에서 돌아온 지 6년 만의 일이고 그의 나이 30살(?) 되던 해이다.

혜초는 그 글 속에서 그가 천복사에서 금강지를 모시고 밀교의 교법을 전수받고는 8년 동안 수행하였고 또한 740년 4월 15일 현종(玄宗)이 천복사를 직접 행차하였을 때 역경 건을 상주하여 5월 5일 윤허를 받아 그 날 새벽부터 향을 사르고 번역에 착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긴 이름의 밀교경전을 금강지가 구술하면 혜초가 받아 적는 식이었는데, 그 해 12월 15일에야 번역을 마쳤다고 한다. 말하자면 둘의 합작 번역이었던 셈이었다.

이렇게 금강지에 이어 그 제자인 불공도 입적할 때까지 대흥선사를 중심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는데, 그가 입적하자 대종 황제는 역시 그에게 대변정광지장(大辨正廣智藏)이란 최고의 시호를 내리고 3일간 국상(國喪)에 준하는 추모기간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불공삼장은 입적에 즈음하여 유서를 남겨 ‘6대 제자’를 부촉하였는데, 그 두 번째가 ‘신라혜초(新羅慧超)’였다. 이 ‘신라혜초’란 네 글자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것을 객관적인 자료에서 고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구절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혜초를 중국 승려로 알고 있을 것이니까.

선유사(仙遊寺)의 기우제(祈雨祭)

혜초는 궁중의 내도량에서 직책을 맡아보았다. 그 때는 스승을 따라 황제가 사는 대명궁(大明宮)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만백성의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을 때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자신이 대종(代宗) 황제의 칙명으로 선유사(仙遊寺)에서 황제 대신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밀교승으로서의 혜초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토번(吐蕃)의 침입(765년) 같은 변란으로 장안이 자주 유린되었던 시기였기에 호국불교 차원이었던지 밀교의 주술적인 신통력에 매달렸던 황제들은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흥선사사지(寺誌)』를 보면 이런 밀교 승려들에 대한 벼슬과 시주물품의 하사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도 이런 배경을 뒷받침할 수 있다.

50년 동안 장안에서의 세월 중에서 혜초 사문의 주된 관심사는 물론 스승의 유촉을 받은 밀교경전의 역경사업이었지만, 그의 위치가 올라감에 따라 내도량(內道場)의 핵심 지송승(持誦僧)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내도량이란 황실의 안녕을 축원하는 궁중 내의 불당을 말하는데, 당시는 대명궁(大明宮)의 장생전(長生殿)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대 황제들의 신임을 받은 불공삼장이 나라의 스승으로서의 제사(帝師)를 겸하고 있었기에 그가 주석하고 있는 대흥선사에도 내불당을 설치하고는 그 곳의 소임을 맡을 7명의 밀교승을 선발하였다. 혜초 사문은 당연히 상석을 차지하였다. 그들의 소임에는 가뭄이 들 때면 황제 대신에 기우제를 주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공이 생존했을 때 나라의 중대한 기우제는 불공 자신이 직접 지냈지만, 그가 병이 들자 그 역할이 혜초 사문에게 돌아왔다.

겨울 가뭄이 심하던, 774년 1월 혜초 사문은 대종(代宗) 황제의 칙명으로 장안 근교의 선유사(仙遊寺) 옥녀담(玉女潭)에서 7일간 밀교의 술법으로 기우제를 지내고 그 결과를 바로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 표문에 의하면, 혜초가 옥녀담에서 밀교의 법식대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쌓고서 향을 피우고 비밀스런 밀주(密呪)를 외우자 이에 산천이 감응하여 계곡에서 소리가 나는지라 사리를 강물 속으로 던졌더니 곧 하늘에서 비단 같은 보슬비가 흡족하게 내렸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말년의 혜초 사문의 초상은 중국 밀교의 최고봉에 우뚝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