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가야불교의 복원을 엎드려 비옵나니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김해 신어산(神魚山) 은하사(銀河寺), 영구암

2007-10-06     관리자

낙동강과 남강 남녘의 산들, 신어산 은하사는 그 낙남정맥의 끝자락에 앉아 있다.
“옛날에는 요즘같이 차도 없어 그저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전국의 산에 이런 운수객들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다. 부산 범어사에서 출발한 운수객이 저 강원도 금강산 마하연을 가기 위해서는 어떤 산길을 타야 가장 빠르고, 중간에 거쳐서 가야 할 절은 어디다 하는 것이 다 정해져 있다.”
옛 노스님네의 말씀은 신어산 은하사에서 곧 지리산으로, 지리산에서 금강산으로, 또 이 땅의 산 어디로든 갈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물론 요즘 말하는 백두대간과 정맥의 종주길이 운수객의 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산과 산으로 이어져 있던 길을 옛 스님들은 일찍이 알아 그 길을 오가며 수행의 길로 들었던 것이다.
이제 그 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그 옆의 큰길에 묻혀 잊혀지고 있다. 사라지는 것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 길에서 마주쳤을 자연과 존재에 대한 경외(敬畏)의 마음 한조각도 더불어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백두대간의 절길, 신어산을 오르며 다시금 느끼게 되는 감회이다.
최근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 촬영지로 더욱 이름이 알려진 은하사(055-337-0101)는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때 장유(長遊)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는 고찰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나 『삼국유사』 「가락국기」 등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면 무려 2,000년 전의 일이 된다. 우리가 배운 불교 공인 시기를 훨씬 앞당겨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판인데 학계에서는 아직도 의견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6세기 신라에 통합되기 전까지 신어산 아래, 낙동강유역을 석권하며 빛나는 문명을 떨쳤던 금관가야에 대한 부족한 연구 때문이다.
장유 화상은 신어산의 영구암과 동림사, 지리산 칠불암까지 창건주로 꼽히는 분이니 신라의 원효나 의상 스님처럼 가야 불교의 시조로 여겨지는 분이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배를 타고 김해까지 건너와 수로왕과 결혼한 허황후의 오라버니되는 이다.
이 도량에서 그는 그의 고향과 가야국을 위해 수행정진하며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출가케 하여 마침내 칠불로 탄생토록 하였고 스스로도 수행정진에 전념하여 성불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후 신라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승대덕과 석학들이 이 곳에서 수행정진하였을 터인데 세월의 더께가 그만 그 흔적을 가려놓고 말았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의 역사는 전해오는 이야기와 정현당(靜玄堂) 안에 모아놓은 여러 현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상우도김해부신어산은하사불상중수개금기(1767년)」,
「중수서림사선당기(1812년)」,
「김해서림사대웅전관음존상개의후불탱화성기(1835년)」 등 10여 매의 현판을 들여다보노라면 마치 글을 쓸 당시 정성스레 붓을 든 스님 앞에서 은하사의 옛일을 하나하나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수로왕의 원당’임을 자세하게 일러주시기도 하고 한때 ‘신라고찰’로 여겨졌던 일이며 중수 공덕주 ‘배(裵) 씨’의 이야기 등.
또한 현판에는 은하사(銀河寺)와 서림사(西林寺)가 함께 보이는데 본래는 신어산(神魚山)이라는 이름과 관련해 은하사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인조 22년(1644년)에 복원하면서 절 이름을 가까이에 있던 동림사(東林寺)와 구별해 서림사라 하고 두 사찰이 중창을 거듭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케 된다.
그 후 일제치하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다시금 잃을 뻔하였던 자취를 이 현판들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현판들 역시 부엌에 아무렇게 놓여 아궁이 속에서 한순간 사그라질 위기에 있었다고. 다시 한번 따뜻한 눈길로 현판을 바라보게 되는 까닭이다.
은하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너럭바위로 놓은 돌계단과 대웅전 앞에서 올려다보는 신어산 정상의 우뚝 솟은 바위들이다. 이 바위들은 모두가 나한상이라 여겨져 지금도 이 곳을 나한도량으로 삼아 기도하는 불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단청과 벽화가 잘 남아 있다는 대웅전이 마침 보수 중이어서 그 예스런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하였다. 대웅전에 모셨을 관세음보살님은 다행히 보제루에 모셔져 있어 참배할 수 있었다. 현판에 드러난 대로 170년 전 ‘개의(改衣)’한 그대로인 듯 과연 위엄과 장엄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새벽녘 도량석 소리에 잠을 깬다. 청정한 스님 절에서는 게으른 객도 덩달아 부지런해지는가 보다. 별빛이 초롱초롱하다.
신어산을 오르는 절 주위로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수백 년 나이의 노송들이 그 속에서 더욱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땀을 식혀가며 쉬엄쉬엄 된비알을 오르니 어느새 영구암에 이른다. 우람한 나무 한쪽으로 옛 3층 석탑이 적벽돌을 탑신삼아 섰는데 그 아래로 은하사와 동림사, 김해 시내와 낙동강이 부채꼴로 한눈에 펼쳐진다.
신어산을 멀리서 보면 그 형상이 거북의 몸체요, 영구암은 그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발짝 뒤로 물러나 보니 석탑이 서있는 자리는 함부로 들어서서는 안 될 신령스러운 곳(靈地)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법당 밑 우물 속에 신어(神魚)가 살았다는 전설 속 영구암의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벼랑길을 타고 산을 오른다.
천진암과 은하사로 가는 산마루 길, 우뚝 선 바위에 잠시 앉아 보라. 힘들게 지고 온 크고 작은 시름이 바람결에 날려 순간 자취를 감춘다. 눈을 뜨면 저 멀리 금정산, 원효산, 무척산이 물결이 되어 다가온다. 산 기운에 취해 걸음은 느림보가 된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은하사 대웅전 안 수미단에는 얼마 전까지 신어(神魚)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장유 화상과 허황후의 고향 인도 아유타국에서 지금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이 문양이 수로왕릉 납릉(納陵) 정문 위에도 그대로 남아있어 인도와 가야불교에 얽힌 아름답고 신비로운 전설을 이어주고 있다.
은하사 관세음보살님께, 신어산 나한님들께 찬란한 가야불교의 복원을 두손 모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