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위빠사나

불광 30주년 연속기획 특집/ 1인 1 수행법 갖기 -위빠사나

2007-10-06     관리자

“ 불교는 삶이고, 삶은 곧 수행이다.” 전에 자주 써먹던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근기가 부족한 걸로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 안 한다. 그냥 몸으로 실천한다. 3개월 간의 단기출가와 위빠사나 수행 덕이다. 몇 마디의 글로 감히 그 경이로움을 담아낼 수는 없지만 나처럼 근기가 부족해서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있을 수많은 분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자 적는다. 나는 산간마을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순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했지만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불교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시는 어느 교수님을 알게 되어 몇 가지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그 분으로 인해 받은 자극은 졸업 후 유학으로 이어졌다. 잠시 여유를 찾기 위해 운동을 하다가 크게 다쳤는데 외국에서는 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와서 치료하는 데 3년을 보내면서 공부는 중단되고, 결국 몇 번의 수술로도 낫지 않았으니 스트레스를 풀려다가 더 큰 스트레스를 몸에 쌓은 격이다.
재가불자운동을 하면서 사회진출 준비를 했지만 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지쳤다. IT 기업에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생겼다. 기공수련이나 티벳과 인도의 명상 등을 두루 익혔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스님들께서 알려주시는 수행법도 명확하지 않았는데, 근기가 낮아서 알아듣지 못하는 거라 하셨다.
윤회, 내 삶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다시 태어나 또 다시 이런 고통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면 도대체 지금 사는 이유가 뭘까? 이런 물음은 즐거운 순간에도 갑자기 찾아와 속 깊은 곳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부처님만큼 깨달아야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그 분은 대천재라 가능했고 우리는 하근기라 안 된단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 되었다. 2,600여년 전에 부처님이 하신 일을 한참 후대에 태어난 우리가 못한다면 그 동안 인간은 퇴보한 것인가?
결국 고민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답을 찾아나섰다. 달라이라마 스님이나, 틱낫한 스님이 쓰신 책을 보고, 어떤 분께 물어도 그 어디에도 답은 없었다. 얼굴의 미소는 점점 공허해지고 마음은 더욱 지쳐갔다.
몇 달 동안 그 끝이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책을 한 권 만났다. 근본불교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불교수행의 이론과 실제』가 그것이다. 이건 다르다. 내 모든 의문과 답이 그 안에 있었다. 수행을 직접 지도하시는 스님을 찾아뵈었다. 한국에서 수행의 기초를 익히고 나가면 외국에 가더라도 편할 거라 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이왕 할 거면 단기출가를 하라고 권하신다. 늘 출가를 꿈꾸면서도 근기부족을 걱정했는데, 3개월이라는 시한이 주어지니 갑자기 겁이 없어졌다. 머리를 깎고, 붉은 가사를 입는 순간의 긴장과 경건해짐은 겪어본 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으리라.
수행은 세상의 존재방식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 일정한 기준점을 두고 정확하게 보는 훈련을 하면 마음은 휴식을 취하게 되고, 점차 강해진다. 마음을 한 곳에 고정시키고 쉬게 해서 마음이 가진 힘을 전자현미경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처님은 호흡을 기준으로 삼아 훈련하셨다. 현재의 위빠사나는 보통 행선 시 움직이는 발과, 좌선 시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기준을 두는 마하시 선사의 방법을 많이 따른다. 좌선은 알아차림을 깨우고, 행선은 집중력(samadhi, 三昧, 止, 定)을 키운다.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충분히 깨어나면 일상에서 수행이 가능해진다.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할수록 자각기능이 깨어나고 마음집중의 힘이 강해진다. 그 둘의 힘이 강해질수록 신경망에 쌓여 있던 삶의 흔적(기억의 무게, 苦, 業, 스트레스, 고정관념)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다.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비로소 세상의 존재방식이 바로 보인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처럼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Sati, 念, 자각)이다. 알아차림이 수행의 모든 요소를 선도한다. 그래서 요즘은 위빠사나라는 말보다 사띠(Sati)수행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위빠사나와 화두선의 원리는 정확하게 같다. 그 둘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아마 두 가지 수행을 다 안 해보신 분들일 것이다. 원리를 분명히 안다면 어느 것이든 쉽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다.
틈 나는 대로 행선과 좌선을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다. 그 보다는 일상에서 알아차림 하려는 노력이 바로 수행이다. 밥을 먹을 때는 이빨에, 걸을 때는 발에, 멈춰있을 때는 배에 기준을 두고 각각의 움직임을 알아차림 한다. 회사 일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협상 전후 5분 정도 상대방을 떠올리며, 마음으로 자비하면서 자비관을 보낸다. 여러 번을 만나야 하는 일이 한두 번이면 결과가 나온다. 그러니 회사 일이 잘 안 될 이유가 없다.
마음 안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알아차림하면 저절로 사라진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속도가 빨라진다. 별 것 아닌 듯한 그 미세한 속도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싸움으로 치자면 상대방의 주먹과 내 주먹이 닿는 시간은 0.001초 차이도 안 되지만 하나는 눕고, 하나는 서있게 된다. 3개월의 집중수행 이후 이제 1년 반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루어내는 일은 몇 배로 커지고, 여유는 더욱 많아졌다.
수행 후 내 짧은 경험에 비해 많이 과분한 회사의 임원자리가 주어졌고, 수행의 응용 방법을 연구하는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그 동안 내가 공부하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은 저절로 정리되었다. 텅 빈 그릇처럼 뭐든지 쉽게 받아들이니 배우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점점 삶에 힘이 생긴다. 시간을 내어 리더쉽 강의에 포함하여 명상을 전하고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빨리 알아 듣는다. 세상이 바뀌고 있나 보다. 부처님의 수행법은 그만큼 정확하고 강력하다.
간혹 위빠사나가 남방의 소승 수행법이어서 대승적 실천이 없다고 폄하하는 말을 듣게 된다. 몸으로 해보지 않고 머리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남방국들의 사회적 특수성을 불교수행의 보편성으로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실수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행은 지혜를 구하는 것이고, 얻어진 지혜를 나누는 것이 바로 자비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한없이 자비로울 수밖에 없고, 자비가 없다면 수행은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 어떤 수행이건 정확하게 수행한다면 지혜를 얻고, 나눔을 실천하게 된다.
더 이상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말자. 몸으로 익히는 것이 부처님 수행의 전부이다. 수행을 시작하면 이미 그 길에 들어선 것이다. 어떤 근기를 가졌건 그 자체로 이미 부처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 수행법을 개발하여 후대에 남겨주신 부처님, 그리고 수행을 지도해주신 다보선원의 붇ㄷ하빠라 스님과 많은 도반 모두는 나에게 생명의 은인이다. 최상의 존경을 드린다. 부디 모든 사람들에게 이 큰 행복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