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법문 - 수행법의 재검토

초대설법 |고엔카 위빠사나 수행 10일 법문

2007-10-06     관리자

10일이 지나갔습니다. 열흘 간 여러분들이 수행해 왔던 것을 재검토해 봅시다.
붓다(佛), 담마(法), 상가(僧), 이 삼보(三寶)에 귀의함으로써 여러분은 이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여러분이 조직화된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한 것은 아닙니다.
위빠사나에서의 개종은 오직 불행에서 행복으로, 무지에서 지혜로, 속박에서 자유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가르침 전체는 보편적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한 인물이나 교리에, 혹은 교파에 귀의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본질에 귀의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발견한 사람은 붓다입니다. 그가 발견했던 길은 담마(법)라고 부릅니다. 이 법을 수행해서 성인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누구나 다 상가에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우리는 마음의 청정이라는 똑같은 목표를 얻기 위해서 붓다, 담마, 상가에 귀의했습니다. 귀의처는 사실, 우리가 자기 안에서 계발하기 위해 추구하는 깨달음의 보편적 본질에 있습니다.
동시에, 수행에서 진보를 이룬 사람에게는 감사하는 마음과 또한 보답으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봉사하려는 의도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특성은 역사적인 붓다인 고타마 싯다르타에게서도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그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발견했던 수행법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성품들이 이 수행법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이기주의의 옛 습성을 어느정도 소멸한 사람 안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진정한 귀의나 진정한 보호는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서 계발해야 하는 법(法)에 있습니다.
그러나 법의 경험과 함께 이 수행법을 발견하고 가르치셨던 고타마 붓다께, 그리고 사심 없이 이 가르침을 2,500여 년 동안 오늘날까지 그 본래의 순수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던 여러 스승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감사하는 마음이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여러분은 삼보에 귀의했습니다.
다음에 여러분은 5계를 지녔습니다. 5계를 지키는 것은 의례나 의식이 아닙니다. 이 계율들을 지니고 그것들을 따름으로써, 여러분은 수행법의 기반이 되는 도덕, 계율을 실천한 것입니다. 계율의 튼튼한 기반이 없다면, 수행의 전 구조는 약해질 것입니다. 계율은 또한 보편적이며, 비 종파적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조화를 방해할 수 있는 육체적·언어적 모든 행동들을 삼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런 계율을 깨트리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의 평화와 조화를 깨트리면서, 마음 속에 굉장한 번뇌들을 일으켜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번뇌들은 일어나고, 그것을 언어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여러분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고 노력해 왔고, 그래서 마음은 정말 고요하고 평화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오염시키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여러분은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요된 마음이 마음을 더욱 더 동요시킬 불건전한 행위들을 하게 하는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해야 끊어버릴 수 있을까요? 위빠사나 코스에서는 여러분에게 이런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꽉 짜인 프로그램과 엄격한 규칙들, 침묵의 맹세, 그리고 수행하도록 강하게 후원하는 분위기 때문에, 5계를 깨트릴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열흘 동안 여러분은 계를 실천할 수 있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선정을 계발했습니다. 그리고 선정수행은 또한 마음의 심층을 통찰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통찰력과 지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 코스 동안 여러분들은 수행법을 배우기 위해 5계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수행법을 배운 뒤에 법을 받아들이고 수행하겠다고 결정한 사람은 일생을 통해서 계율을 지켜야만 합니다.
다음, 여러분은 붓다에게, 그리고 이 10일 코스의 현재 선생님에게 여러분을 맡겼습니다. 이 맡김은 이 수행법이 여러분 안에서 공정하고 적절한 시도를 하게끔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길에 자신을 맡겼던 사람만이 최대한의 노력을 발휘하여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의심과 회의가 가득한 사람은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맡김은 맹목적 믿음을 키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마음 속에 어떤 의심이 일어나면,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 필요한 만큼 자주 지도 선생님에게 가십시오.
맡김은 또한 코스의 규범들과 수행 일정표에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10일 동안에 가능한 한 가장 효과적인 이익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여러분이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이전에 수행했던 수천 명의 수행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맡김으로써, 여러분은 가르침 받은 대로 정확하게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전부터 수행해 왔던 수행법들은 어떤 것이든지 이 코스기간 동안은 밀어 놓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전적으로, 그리고 바른 방법으로 오로지 이 수행법을 실천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여러 수행법을 병행하는 것은, 여러분을 어쩌면 심각한 어려움으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마음의 통제력, 선정력을 계발시키기 위해서 아나빠나, 즉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호흡에 어떤 말이나 형상, 혹은 모양도 더함이 없이 오로지 자연적인 호흡만을 관찰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제한을 두는 이유는 수행법의 보편성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호흡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이며,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호흡에 특정한 말이나 형상을 가미한다면, 일부의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오로지 호흡만을 관찰하는 데는 좀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호흡의 전 과정은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서의 마음과 신체 구조,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의 탐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조사입니다.
여러분은 앉아서 눈을 감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없고 외부의 방해도 없으며, 몸의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 순간에 여러분 안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활동은 호흡입니다. 여러분은 콧구멍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자연스런 호흡, 이 실재를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호흡을 느끼지 못했을 때는 약간 강하게 호흡하는 것이 허용되며, 오로지 여러분의 주의를 콧구멍 주변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여러분은 자연적이고 정상적이며, 부드러운 호흡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와 같이 거칠고 분명한 외관상의 진리를 가지고 시작해서, 좀더 깊고, 좀더 미세한 진리의 방향으로,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로 나아갑니다. 수행의 전 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여러분은 가장 거친 것에서부터 가장 미세한 것에까지, 그리고 여러분이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그 진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상상력으로 시작한 수행에 의해서!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직 자기 기만이나 더욱 굉장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수행의 대상인 호흡에 어떤 말이나 단어를 사용했다면, 여러분은 좀더 빨리 마음을 집중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는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말에는 특정한 파장이 있습니다. 말이나 어떤 구절을 반복하여 암송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빠져들게 될 인위적인 파장을 만듭니다. 그러면 마음의 표면적인 단계에서는 평화와 조화의 층이 형성되나, 마음의 심층에서는 여전히 번뇌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깊이 잠재된 마음의 번뇌들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들을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번뇌들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도록 하고, 그것들이 사라지도록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특정한 인위적인 파장만을 관찰한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번뇌와 관련된 자연스런 파장들을 관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몸 안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감각들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목적이 자기 자신의 실재를 탐구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면, 상상의 말을 사용하는 것은 수행해 나가는 데 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으로 형상이나 모양을 그리는 관상법도 수행의 진보에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빠사나 수행법은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두드러진 외관상의 진리를 허물어버리는 곳으로 이끌어 갑니다. 두드러지고 통합된 진리는 항상 착각으로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단계에서 과거의 상카라들에 의해 왜곡되어진 인식작용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조건되어진 인식은 새로운 상카라들에 편애와 편견을 일으키면서 분별하고 구별합니다.
그러나 두드러진 외관상의 실재가 녹아짐에 의해서, 수행자는 점차적으로 정신과 육체의 구조에서 매 순간 오로지 진동의 일어남과 사라짐뿐인 궁극적인 실재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이 단계에서 분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편애나 편견은 일어나지 않고, 반응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수행법은 조건되어진 인식작용(想, sanna)을 점차적으로 약화시키고, 인식작용과 감수작용(受,vedana)이 멈추는 단계인 열반의 경험으로 이끌면서, 반응작용(行,sankhara)도 약화시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형상이나 모양, 혹은 어떤 심상에 주의를 기울이면, 수행자는 여전히 외관상 만들어진 실재의 차원에 머물며, 그것 너머로 향상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관상이나 염송 모두 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자연스런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집중을 수행한 뒤에, 당신은 당신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지혜를 계발하기 위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 안의 자연스런 감각들을 관찰해 왔습니다. 몸의 표면에서 시작하여 좀더 깊이 들어가며, 몸의 모든 부분, 내부나 외부에서 감각들을 느끼기 위한 수행을 배웠습니다.
두드러진 외관상의 진리를 허물어버리고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관찰하는 것, 이것이 위빠사나(Vipassana)입니다. 두드러진 외관상의 실재를 허물어버리는 목적은 수행자로 하여금 ‘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환상은 우리들의 모든 욕망과 혐오의 뿌리에 있으며, 그것은 굉장한 고통으로 이끕니다. 지성적으로 “‘나’라는 것은 환상이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받아들임이 고통을 끝내는 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