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42.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신 왕오 천축국전 별곡 42

2007-10-06     김규현

석라국(石幾國)이었던 타슈켄트

혜초 사문의 발길은 중원으로 돌아갈 안전한 루트를 찾기 위해 사마르칸트에서 북상하여 타슈켄트로 이어졌다. 이 길은, 혜초가 지나갔을 때는 말과 낙타만이 왕래하던 초원지대로 이어진 유서 깊은 실크로드의 대상로였지만, 현재 나그네가 달려온 길은 물론 잘 포장된 고속화도로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우즈벡의 두 도시를 잇는 그 도로는 남의 나라 땅인 투르쿠메니스탄의 영토를 통과해야만 하는 이상한 상태였다. 다행히 도로 곳곳에 설치된 국경검문소에서는 통과하는 차량만을 대충 조사할 뿐 승객들은 무사통과시켰다. 차에서 내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비행기를 탈 때의 ‘통과여객’ 같은 셈이었다. 이런 기묘한 국경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속칭 독립국가연합[C.I.S]이라는, 구소련연방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제국의 성립배경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고대로 올라가 고선지 장군과 이슬람 연합군이 격돌했던 시대로 소급해야만 한다. 타라스 강의 대회전이 지나고 수백 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칭기스칸의 검은 회오리바람이 지나가고, 다음으로 티무르 제국이 건립되어 한 세기가 지난, 14세기가 되어서야 원래 우랄 산맥 남단에 살던 투르크계의 유랑민이었던 현재의 우즈베크 민족이 속디아나로 이동해 들어왔다. 그러다가 티무르 제국이 연이은 내분으로 쇠약해지자 황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16세기 초 마침내 티무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사마르칸트로 무혈 입성하여 우즈벡 민족의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통일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지역별로 부하라, 키바, 코칸트란 이름의 군소 칸국(汗國)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근대를 맞아 이번에는 영국의 진출을 막는다는 구실로 차례차례 군소 칸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한 제정러시아에 의해 1925년에 소비에트공화국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붉은 러시아 땅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구소련연방이 해체되기 시작하자 1991년 9월에는 우즈베키스탄공화국으로 본의 아니게 분리 독립하게 된 것인데, 이 때 국경선이 현 실정과 동떨어지게 그어진 탓으로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이라 한다.

이렇게 건국된 이 나라의 수도가 바로 타슈켄트이다. 혜초가 ‘석라국’이라 불렀던 바로 그 곳이다. 혜초는 이 나라에 대해서 특별한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다만 ‘호국 6국’으로 묶어서 공통적 사항만 몇 가지 기록했을 뿐이다. 사마르칸트에 비해 별 특징도 없는 곳이기에 나그네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단지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중국령 실크로드를 거쳐 장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국경이 열려져 있지 않았기에 그 방법밖에 없었다.

현재 타슈켄트에는 대우자동차의 공장이 설립되어 있어서 우리와 경제적인 협력관계가 있고 또한 제정러시아 말기에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당했던 수많은 한민족 동포가 살고 있었지만, 사마르칸트에 비해 별 매력이 없는 도시이기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천마(天馬)의 산지 페르가나(Ferghana)

그러나 타슈켄트를 떠나기 전에 혜초가 갔었을 곳으로 여겨지는 ‘페르가나국(跋賀那國)’, 즉 현재의 페르가나(Fergana)는 꼭 다녀와야 했기에 버스를 타고 유서 깊은 나라로 향했다. 페르가나 계곡은 현재는 한 마디로 복잡한 지형으로 우즈벡, 타지키스탄, 키르기스탄 세 나라의 삼각지점이다. 그래서 타슈켄트에서 기차를 타면 딴 나라인 키르기스탄의 호젠트(Khojent)라는 도시를 거쳐서 가야 한다.

그 이유는 구소련에서 분리될 때 민족별로 국경선을 그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한다. 국경선이 그렇게 복잡하게 섞여 있는 지형 속에 있지만 페르가나는 천산산맥과 기사르산맥 사이의 거대한 삼각형의 분지로 천산에서 발원하는 시르 다리아(Syr Darya) 강의 상류지역으로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로 인해 예부터 목화를 비롯한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는 곡창지대로 이름이 높았다.

이 지방이 예부터 동서양의 역사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그 첫째는 천마(天馬)라는 별명의 명마의 산지이고, 다음으로 대 실크로드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한(漢)대에는 페르가나를 대원(大宛) 또는 발한나(拔汗那)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대 여행가 장건(張騫)이 다녀가면서부터였다.

한 무제(武帝)는 월지족과 손을 잡고서 흉노족을 쳐서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위해 장건을 서역으로 보냈다. 장건은 B.C. 139년 중원을 출발하였으나 도중에 흉노에게 사로잡혀 10여 년을 지내다가 감시가 느슨해지자 탈출을 감행하여 서쪽으로 길을 재촉하여 마침내 대원국-페르가나에 도착하였다.

그 뒤 대원국의 도움으로 강국-사마르칸트로, 다시 월지-속디아나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이미 새 땅에서 정착한 월지족과의 연합은 실패하고 빈손으로 13년 만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견문에 의해 대원국의 천마가 한나라에 소개되었다.

이에 한 무제는 B.C. 102년, 이광리(李廣利) 장군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대원국을 정벌하고 3천 필의 천마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에 한 무제는 명마를 얻은 기쁨에 겨워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천마가 오네. 서쪽 끝에서 오네. 만 리 먼 곳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네./영특한 위풍을 이어받아 외국을 굴복시키니/대 사막을 건너와 사방의 오랑캐가 이에 복종하네.”

그 이후 페르가나와 장안 사이에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던지 『사기(史記)』 대원 조를 보면 얼마나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 무제가 대원의 말을 좋아하여 사자가 길에서 마주칠 정도로 빈번하게 오갔다. 이러한 사절단은 한 무리가 큰 것은 수백 명이고 작은 무리는 수십 명이었다. (중략) 이런 무리는 많을 때에는 해마다 수십 회 적을 때에도 5~6회씩 파견되었다. 가까운 곳도 수년이나 걸리는 여행이었다.”

우리의 혜초 사문은 이 나라를 ‘대원국’으로 부르지 않고 페르가나로 불렀다. 혜초는 아마도, 귀향길을 모색하고 싶어서였던지, 아니면 단순한 순례였는지, 강국-사마르칸트에서 동쪽으로 이 나라에 들어와 다시 쿠탈국으로 넘어가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또 강국으로부터 조금 동쪽은 페르가나국이다. 이 나라에는 왕이 두 사람이 있다. 시르 다르야[縛叉大河, Syr Darya] 강이 나라의 중앙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데, 강 남쪽에 한 왕이 있어 대식국에 속해 있고, 강 북쪽에 한 왕이 있어 돌궐에 속해 통제를 받고 있다.”
페르가나 분지에서 이웃 키르기스탄을 경유해 천산 산맥의 베델 고개를 넘으면 바로 카슈가르가 나온다. 이 길이 옛

실크로드의 천산북로 길이다. 그러나 혜초는 이 직행로를 택하지 않았다. 하여간, 페르가나에서부터 혜초의 귀국로는 후인으로 하여금 아직도 많은 의문을 품게 만들지만, 우리의 혜초 사문은 무사히 파미르 고원을 넘어 돈황으로, 다시 장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