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한담] 소승과 대승

지산 스님의 수행한담

2007-10-06     지산스님

우리나라에서는 미얀마, 타이, 스리랑카 등의 상좌부 불교를 예로부터 소승불교라고 불러왔다. 과연 어떤 것이 소승이고 어떤 것이 대승인가? 이 문제에 대한 미얀마를 비롯한 상좌부 불교 쪽의 입장은 어떠한가?

상좌부의 입장에 의하면 한 개체가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길이 있다. 첫째 아라한, 둘째 독각(獨覺), 셋째 붓다. 물론 아라한이라는 용어는 번뇌를 다하고, 다음 생을 받지 않고,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보면 위의 셋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좁은 의미로 볼 때 이 세 길은 서로 다르다.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라한은 살아 있는 붓다에 의지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붓다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구경각을 성취한다. 독각은 스스로 구경각에 도달하지만 중생제도의 인연이 없기 때문에 다른 중생들을 제도하지 못한다.

붓다는 스스로 깨닫고, 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며, 아라한이나 독각과는 확연히 다르게 일체지(一切智)를 갖추고 있다. 이 일체지는 열반을 증득함으로써 완성되는 반야지(般若智)와는 달리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혜다.
붓다는 알고자 하는 의도만 일으키면 자신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과거의 일 현재의 일, 그리고 결정된 원인을 가진 미래의 일 모두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아라한이나 독각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일체지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중생제도를 위해서다.
각 개인의 지나온 삶의 흐름과 현재의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그들을 빨리 구경각으로 인도할 수 있고, 심신현상의 깊은 본질과 상호 인과를 꿰뚫음으로써 바른 법을 펼칠 수 있으며, 과거 많은 시대의 중생들의 흐름과 붓다 시대의 규범들을 파악하여 이 시대에 맞는 계율을 정함으로써 불법이 오래 지속되도록 할 수 있다.

경전에 의하면 아라한들과 고타마 붓다 간의 지혜와 자비와 능력(방편)에 있어서의 엄청난 격차를 알 수 있다. 그 많은 아라한들 중 지혜 제일이라는 사리뿟따도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해서 붓다에 의해 종종 시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라한의 길과 붓다의 길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고타마 붓다의 전생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본생담(자타카)에 보면 그가 아득한 과거 생에 그 당시 출현하신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그는 이미 공중을 날아다닐 정도의 뛰어난 선정력을 갖추고 있었고, 연등불을 보는 순간에 그를 따라가 그의 가르침을 받으면 그 날을 넘기지 않고 아라한이 되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때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한다. ‘나 혼자 해탈해서 무여열반을 이룬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나도 저 연등불처럼 붓다가 되어 많은 중생을 제도해야지.’ 이 결심을 알아차린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은 그는 연등불을 떠나, 붓다가 되기 위한 그 아득히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 때로부터 4아승지 겁 10만 겁을 지나, 슛도다나 왕의 아들 싯다르타로 올 때까지 그는 깨달음의 첫 경지인 수다원도 되지 못한 중생이었다.

열반을 체험하여 수다원과에 들면 7생을 넘기지 않고 구경각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고, 그것은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수많은 윤회전생의 삶을 되풀이하면서도 그는 깨달음의 세계에 들지 않고 자신의 해탈을 유보해 왔다.

깨달음의 유보, 이것이 진정한 보살의 길이라고 상좌부 불교도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 물론 많은 수행을 했지만 수행 이외에도 그는 엄청나게 많은 공덕행을 했다.
때론 왕으로, 때론 큰 부자로, 때론 자기의 왕국을 내어 주고, 아들 딸과 부인까지 타인을 위해 보시하고, 때론 굶주린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이 공덕행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수행이 완벽해도 일체지가 열리지 않는다는 게 상좌부의 정설이다.

이러한 공덕행은 곧 자기 희생이요, 대자비인데 일체 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일체지가 열린다는 것이 인과의 도리에서 볼 때 맞지 않을까?

미얀마 양곤에는 쉐다곤 대탑이 있다. 100미터 가까운 높이의 그 황금 대탑에는 고타마 붓다의 머리카락 몇 올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머리카락 몇 올을 통해서도 그토록 숭배되는 그 분. 그 분이 오신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의지해 자기 삶을 꾸려나갔고 마침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했던가. 또 천신들을 포함한 비인간의 수는 그 얼마이던가?

상좌부 불교인들은 이러한 붓다의 길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직 극소수의 큰 발원과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또 지금 이 시대에는 붓다의 법이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어, 누구나 팔정도를 통해서 아라한이 될 수 있는데, 굳이 어렵고 힘든 보살의 길을 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도 보살의 원력을 가지고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최고로 존경받는다. 자녀들을 불상 앞에 데리고 와서 붓다를 본받고, 붓다처럼 되라고 가르치는 미얀마의 아빠 엄마들. 하지만 그들은 붓다의 길은 너무 어렵고 험난해서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성불(成佛)이라는 말을 너무 쉽고 가볍게 쓰고 있다. 불자들 간의 기본적인 인사가 “성불하십시오”이니까 물론 좋은 일이다.

우리 모두가 다 성불해서 이 사바세계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들의 삶이, 그리고 우리들의 수행이 붓다의 길로 향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진정 대승이라고, 그렇지 못한 너희 상좌부는 소승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수행 과정 중에 일체지를 얻을 수 있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자신의 깨달음을 유보하고 멈추어서, 진정한 붓다가 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공덕행을 쌓을 수 있는 단계가 있는가?

진정 붓다가 되고자 하는 불제자라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