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불교] 필립 웨일런(Philip Whalen)

서양의 불교

2007-10-06     진우기

1960 년대에 많은 서구 젊은이들을 선불교에 이끌었던 문화사조 중에 ‘비트 운동(Beat Moveme-nt)’이 있다.

비틀즈와 밥 딜런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 비트 운동은 제2차 대전 후 미국의 젊은 문인들이 일으킨 반항적이고 과격한 문학 운동을 가리킨다. 시인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액, 게리 스나이더, 필립 웨일런 등이 그 주요 작가이다.

그들은 전후에 안정기에 처한 자본주의 사회의 무기력함에 분노하여, 선(禪)을 통한 신비적 체험과 재즈, 초고속력 자동차에 의한 강렬한 자극을 추구하였으며, 혼란스럽고 복잡하면서도 원초적 생명력이 약동하는 힘찬 표현 양식을 만들어 냈다. 이들이 행하던 선을 ‘비트 선’이라 한다.

비트 운동은 샌프란시스코와 그리니치 빌리지 등에서 보헤미안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비트(Beat)’는 원래 ‘기진맥진한’이라는 뜻이며 후에는 ‘행복에 넘친(beatific)’이라고 해석되기도 했다. 자신들이 관습적이고 ‘획일적인’ 사회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허름한 옷과 격식 없는 태도, 그리고 재즈 음악가들에게서 빌려온 ‘히피’ 어휘를 썼던 이들은 정치나 사회 문제보다는 마약, 재즈, 섹스, 선 수련을 통해 얻은 고도의 감각적 의식을 통한 개인적인 해방, 정화 및 계시를 주창했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이들에겐 오직 도피와 반항만이 정당했다. 반문화 운동의 선두에 섰던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히피족, 반전운동가들,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을 선호하는 사람들이었다.

비트 시인들은 자유로운 삶을 찾아가는 길의 동반자로서 선불교를 택했고, 그런 그들의 불교적 의도나 수행이 작품을 통해서 신비롭게 전해졌기에 이들의 작품을 읽는 대중과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따르는 팬들에게 폭넓게 불교가 전해질 수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작품에 대한 영감을 찾기 위해, 삶을 재충전하기 위해 참선을 했지만 개중에는 아예 선불교에 입문하여 스님이 된 사람도 있다. 필립 웨일런도 그런 비트인 중 하나이다.

선승 웨일런은 스즈키 순류 선사로부터 법을 전해받은 리차드 베이커 선사에게 1973년 수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 후에 샌프란시스코 선원에서 문제를 일으켜 주지직을 내놓은 베이커 선사가 산타페로 단 몇 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떠날 때, 웨일런도 그를 따라가서는 한동안 그 곳에서 함께 지내다 돌아왔었다.

베이커가 멀리 법문을 하거나 여행을 할 때면 그는 기꺼이 주지 소임을 떠맡으며 없는 듯이 그 곳에 살았다. 온화하며 매우 의리가 있었던 웨일런은 두 살배기 같은 신선한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동안(童顔)이 삭발한 머리, 툭 튀어나온 아랫배에 얹힌 듯한 가사와 함께 하면 더욱 과장되어 보인다. 헌칠한 키에 마른 느낌의 스승 베이커와 뚱뚱하고 배가 나온 제자 웨일런이 산타페의 수퍼마켓에서 나란히 쇼핑을 하는 장면은 마치 돈키호테와 산초가 함께 있는 것을 희화(戱畵)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웨일런은 스승 베이커의 하인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해 전혀 괘념하진 않았지만, 베이커가 몰고 다니는 대중의 선풍적 관심과 사건의 소용돌이가 마음에 안 들었고, 자신은 좀더 보수적인 선과 홀로 있는 삶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1991년 웨일런은 에이즈 말기환자를 주로 돌보는 하트포드가 선원의 선원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 곳에 애정을 가지고 돌보던 이산 도시 스님이 에이즈로 사망한 후의 일이었다.

웨일런은 1923년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2차대전 중 육군에 복무했던 그는 제대 후 참전용사 복지법안인 ‘GI Bill’을 통해 리드 칼레지(Reed College)에 들어갔고 1951년 학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웨일런은 게리 스나이더와 한 방을 썼으며 이후로도 평생을 친구로 지냈다. 또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액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케루액의 소설 ‘다르마를 찾는 백수’에 나오는 ‘워렌 코플린’은 바로 웨일런을 모델로 한 것이다. 1955년 10월 긴즈버그가 포효를 낭독하던 그 역사적인 밤에 웨일런도 그날 발표하는 여섯 시인에 끼어 있었다.

대학 시절 이미 문학에 심취해 소설을 쓰느라 수업을 하도 빼먹어서 퇴학당했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복귀한 웨일런은 스나이더와 함께 동양사상, 하이쿠, 선불교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는 1953년 선불교 에세이집을 읽다가 선불교 안에 화가, 시인, 광인을 비롯해 별의별 사람이 다 있음을 알게 된 후 선불교가 자신에 맞는 것이며 멋진 것이라 느꼈다고 한다.

"이 벚꽃은 이레 후면 지겠지
나는 그 전에 가겠지"


이 시에 대해 웨일런은 벚꽃은 내년이면 다시 피지만 자신은 조만간 영원히 사라질 것임을 말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부서지기 쉽고 너무나 잠깐 동안만 존재하는 물체의 절대적 영원성을 말했다고도 덧붙였다. 여기서 물체란 이 글을 쓰는 나뿐 아니라, 별들과 저녁식탁에 오른 햄과 벚꽃도 포함한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할 때 기계적이고 따분한 삶이 무언가 마술 같고 바보 같고 즐거운 것으로 변한다. 세상 속의 평범한 것들을 외경스런 마음으로 다루고, 자신에 대한 비난을 통해 유머를 발견했으며, 정치적 색채가 전혀 없었던 그의 작품은 이미 충분히 선불교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강한 독립성을 가졌던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내재하는 작은 아름다움을 찬탄하였다.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옮겨놓는 자신의 시를 일러 그는 ‘신경성 영화’라고 장난스럽게 부른다.

비트의 동료 시인인 조앤 카이거(Joanne Kyger)가 쓴 ‘필립 웨일런의 모자’라는 시에서는 부드러운 푸른 색 옷을 입고 쉬임없이 긴 나무염주를 돌리는 그에게 무슨 진언을 외고 있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선(禪)에서는 그런 걱정 안 해 , 그냥 염주하고 놀면 돼."

1993년 웨일런 선사는 백내장 때문에 먹은 약이 오히려 잘못되어 거의 실명상태에 이른 데다 심장수술까지 받아 무척 우울한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도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는 하트포드 센터의 다른 건물에 있는 에이즈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 이 때 그를 오후에 돌보아주던 지인은 한때 강렬한 감정을 그려냈던 그의 시를 읽은 다음 그의 방에 들어가면, 너무나 대조적인 노령과 다가오는 죽음, 조용한 실패를 보는 것이 못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웨일런 선사의 장난기는 죽는 날까지도 남아 있었다. 1999년 그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에게 문을 열어주며 안녕하시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뚱뚱한 몸에 숨까지 차.”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2002년 6월 죽음을 며칠 앞둔 그의 병실에 모여 너무나 침울해하는 친구들에게 웨일런 선사는 다시 한번 농담을 던졌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 때 얼린 산딸기를 가득 깐 침대에 눕혀 줘.” 그래서 그의 장례식에는 꽃과 함께 산딸기가 헌정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