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를 기다리며

지혜의 향기/ 여름 탈출기

2007-10-06     관리자

내 나이 쉰이 훌쩍 넘어섰건만, 살아오면서 마음 편하게 피서 한 번 제대로 떠나본 적이 없다. 2남 1녀를 힘겹게 키우다 보니 피서라는 말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남의 얘기로만 여겨졌다. 사회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2~3일 여름휴가를 얻어, 집안일을 하며 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나만의 피서법이 생길 것 같다. 작년 가을에 큰애를 제치고 먼저 결혼한 둘째가 나를 할머니로 만들어 준단다. 우리 동창들은 벌써 할머니가 된 친구들이 꽤 있다. 손자, 손녀의 재롱에 행복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가끔은 부러운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던 터라, 이제 열흘 후면 세상에 태어날 손주 녀석을 본다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올 여름은 그 녀석을 보는 재미로 더운 줄 모르고 지낼 것 같다. 작은 체구의 우리 며느리가 이 무더운 여름 뒤뚱대며 다니는 걸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지만 나를 할머니로 만들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올 여름은 10년 만에 찾아오는 무더위라는데 곧 태어날 손주 녀석과 며느리가 잘 견딜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앞으로 세상에 나올 손주 녀석을 기다리는 마음은 괜스레 가슴이 벅차오르고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있을까. 그 동안 고생하며 살아온 세월이 눈 녹듯 다 사라지는 것 같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서야 새삼 깨닫게 된다.
손주 녀석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재미있는 상상을 하다보면 더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우선 손주 녀석의 얼굴을 그려본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시작해 똘똘하게 잘생긴 사내아이를 그려보다가, 아주 귀엽고 예쁘게 생긴 계집아이를 그려보면 어느새 얼굴엔 저절로 엷은 미소가 띠어진다.
살아오면서 먹고 사는 데 바빠 3남매를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바르게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손주 녀석이 태어나면 커가는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질 않을 것이다. 올 여름, 손주 녀석을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며 평화롭게 잠든 얼굴을 보다보면, 그것이 최상의 피서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