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41.사마르칸트의 영광이여!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41

2007-10-06     김규현

‘뵈유크 이페크 율루’(대 실크로드)의 길목

오래도록 혜초 사문의 발자취를 따라 10여 개국을 돌아다니는 동안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보다 언어문제였다. 영어권으로 세계가 단일화된 오늘날에도 그럴진대, ‘그 옛날에 님은 도대체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때가 많았었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새삼스레 님의 위대함이 간절해짐을 어쩌지 못했다.

내 경우에는 아프간과 우즈벡의 경우가 특히 어려웠는데, 특히 우즈벡은 오랫동안 구소련에 속해 있었기에 러시아어와 우즈벡어가 국어로 되어 있었지만 그 외에 타지크어, 카자크어 등을 각자 쓰고 있어서, 출국할 때 사가지고 온 러시아 사전에 의한 알량한 러시아어 몇 마디와 손짓 발짓 등을 총 동원하는 ‘생존어(生存語)’만 가지고는 곤란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일단 ‘생큐’ 해서 반응이 없으면 ‘스파시버’ 또는 ‘부라흐마트’ 했다가 그것도 저것도 안 되면, 두 손을 잡고 흔들며 씩 웃는 식이었다. 어색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먹혀드는(?) 수법이었다.

그 외에 돈도 아주 ‘문제거리’였다. 무슨 소린가 하면, 이 나라는 화폐단위가 우리와 비슷할 정도로 높고, 거기다 화폐가 모두 소액환이어서 한 끼 식사 값으로 한 움큼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 정도여서, 만약 1백 달러 정도를 우즈벡 화폐 ‘숨(soum)’으로 바꾸면 지갑에다 도저히 집어넣을 수가 없어서 돈가방을 하나 마련해야 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이웃나라 키르기스탄의 화폐는 ‘솜(som)’이어서 남쪽 나라(인도, 파키스탄, 네팔, 아프간)에서 공통적으로 쓰던 ‘루피’의 익숙함에 비해 여간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각설하고, 아무다리아 강을 건넌 혜초는 유명한 철문관(鐵門關)을 거쳐 안국(安國)-부하라(Bukara)를 경유하여 385km 떨어진 강국(康國)-사마르칸트로 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사기(史記)』에 ‘대월지국’으로 알려진 곳이다.

“대월지국(大月腥國)은 대원(大盈, Fergana)의 서쪽으로 대략 2~3천 리에 있고 위수(僞水 Sry Darya)의 북쪽에 있다. 그 남쪽은 대하(大夏), 서쪽은 안식(安息), 북쪽은 강거(康居, Samarqand)에 접한 행국(行國)으로 가축과 함께 이동하면서 살아간다.”

이 나라는 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의 여행 이후 당 대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원정 등으로 중원과 깊은 관계가 깊던 곳이었다. 그러나 751년 타라스(Taras) 강변에서 벌어진, 중앙아시아의 주인을 가르는 역사적인 대회전에서 참패한 후로 완전히 이슬람권으로 편입되었고 한때는 티무르(Timur) 제국의 수도로서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또한 ‘뵈유크 이페크 율루(yolu)’, 즉 ‘대 실크로드’의 중간교역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혜초가 ‘강국’으로 불렀던 사마르칸트는 속디아나의 중남부 제라프샨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계곡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드넓은 옥토가 펼쳐진 곳이어서, 한겨울인데도 보리싹이 파랗게 솟아나고 있어서인지 ‘중앙아시아 대초원’이라는 단어가 언뜻 떠오를 정도로 광활하고 전원적이었다.

역시 푸른 색 타일로 뒤덮인 고도 사마르칸트는 명불허전이었다. 그만큼 고색창연하였고 ‘푸른 타일의 제국’의 수도다웠다.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마라칸다로 불려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찬탄을 받을 만큼 아름다웠다.

“강국에 절 하나와 승려 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중앙아시아 최대의 볼거리라는 레기스탄(Registan) 광장을 비롯해 대제국을 이룩한 일세의 영웅 티무르(Amir Timur)가 잠들어 있는 구르아미르 묘지를 기웃거리다 혜초의 기록에 나타난 곳을 찾아 나섰다.

물론 이 고도의 매력이 직선과 곡선을 절묘하게 이용한 거대한 원형 돔과 미나렛의 조화와 푸른 타일의 단조로운 아름다움에 있지만, 그보다도 나그네의 관심은 혜초가 언급한 ‘절터’에 있었던 만큼 당연한 순서였다. 다행히 그 곳은 찾기가 쉬웠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아프라시아브(Afrasiab)라는 언덕인데 이슬람화되기 이전, 즉 불교가 성했던 시대의 옛 성터로 그 현장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발굴 당시의 벽화를 원본대로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 뜻밖에도 ‘신라 사신도(使臣圖)’라고 전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각양각색의 방문객의 뒤에서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서 있는 두 사람은 한눈에도 신라인으로 보였다.

사마르칸트와 중원간의 교류는 한대 이후 상황에 따라서는 일시적으로 단절되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신들의 왕래는 끊이지 않았던 것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고, 혜초의 순례 직후 고선지가 이곳을 공략한 것을 보아도 당나라 때에도 강국과 중원간의 교류는 상당히 밀접하였기에 신라 사신들의 강국 방문이란 안내책자의 문구는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이런 사신도는 장안, 뚠황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고 토번(吐蕃)의 뵌뽀교의 사제들도 비슷한 조우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벽화작법상의 도본(圖本)에 의한 임사(臨寫)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좀더 고증을 요하는 문제이지만, 그런 학술적인 면을 떠나서라도 이역만리에서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배달민족의 흔적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박물관을 나와 뒷문으로 아프라시아브 언덕으로 올라갔다. 무너진 흙더미만 드넓게 펼쳐진 곳이지만,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8세기 이전의 도읍지로 확인된 곳이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의 혜초가 강국 - 사마르칸트에 왔었을 때 배화교 틈바구니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 곳일 가능성이 많은 곳인 것이다. 혜초는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또 대식국의 동쪽은 모두 호국이니 곧 안국(安國), 조국(曹國), 사국(史國), 석라국(石幾國), 미국(米國), 강국(康國)이다. 각 나라에는 비록 왕이 있으나 모두 대식국의 통치하에 있다. 나라들이 협소하여 병마가 많지 않아 스스로 지킬 수 없다. (중략) 또 이 여섯 나라는 모두 배화교(拜火敎)를 섬기며 불법을 알지 못한다. 강국(康國)에 절 하나와 승려 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그도 또한 불법을 잘 몰라 공경할 줄 모른다.”

폐허의 고도에 떨어지는 저녁 해는 유난히 나그네의 귀소본능을 자극한다. ‘오늘 밤은 또 어디서 잠을 자야 하나?’ 하는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양을 등지고 나그네는 그림자를 앞세우고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티무르의 부인이 세웠다는 거대한 모스크, 비비하늄 아래에 있는 바자르(bazar) 시장은 동서양의 사서에 기록된 중앙아시아 최대의 유명한 시장이기에 당연히 가보아야 할 곳이지만 오늘만은 혹시나 조선말을 할 줄 아는 동포를 만날 수 있을 것이거나 또는 시큼한 김치라도 한 점 얻어먹을 행운 쪽으로 기우는 원색적인 욕망을 스스로 다독거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