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것을 먼저 챙기시는 천진불

우리스님/ 오봉산 석굴암 도일 스님

2007-10-06     관리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오봉산 관음봉 중턱에 턱 자리잡은 석굴암은 서울 인근에서는 숨은 보석과도 같은 나한기도도량이다. 절 뒤로 펼쳐진 훤출한 산세가 그렇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 또한 맑고 깊다. 게다가 군부대 초소를 통과해야만 갈 수 있어, 아직까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지라 서울과 바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천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석굴암이 좋은 것은 무엇보다 아홉 살 동진출가하신 천진불 도일 스님이 항상 그 자리에 계시고, 언제나 넉넉한 마음을 내어쓰시는 청호 보살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석굴암은 자주 가고 싶고, 가면 앉고 싶고, 앉으면 기도가 절로 되는 절이다. 어디 그뿐인가. 200개가 넘는 항아리에 담아둔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 장아찌며 김치를 먹어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저장식품 중에는 7~8년 이상이 된 것들도 가득하다. 2005년 천일기도 두 번째 회향(4월24일)일에 먹을 김치가 4년째 땅 속에 저장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석굴암의 공양물들은 절 안에서 다 자급자족한다. 밖에서 사들여 오는 것이 거의 없다. 보잘 것 없는 마사땅에 퇴비를 주어 기름지게 가꾼 땅에 호박이며 감자, 고추, 오이, 가지, 콩, 도라지, 더덕 등 절에서 먹을 농작물을 가꾸고, 첫 수확물은 반드시 부처님전에 제일 먼저 올린다.
이상한 것은 밖에서 사들여 오는 농작물은 금방 썩는데 이렇게 복토에서 자란 야채는 한 달을 두어도 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오신채와 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고 간장으로 대부분의 음식들을 간한다. 부득이 소금을 사용해야 할 때에도 3~4년 묵혀 간수를 다 뺀 까슬까슬한 소금을 쓴다. 사과며 배, 감, 수박, 참외… 부처님 전에 올려진 과일들도 때로는 음식재료가 된다. 청호 보살님의 손맛 또한 담박하고 깔끔하다.
보살님이 석굴암에 오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이다. 평생 같이 사실 줄 알았던 어머님의 죽음에 무상을 느껴 불교에 입문해 찾은 첫 절이었지만 전생의 인연인지 길이며 절이며 스님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지금은 열반하고 안 계신 초안 큰스님께서는 보살님을 보자마자 첫 마디가 “세속에 인연이 없으니 절에 들어와 살라”는 것이었다. 불호령을 내리듯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크시던지.
조그마한 실수가 스님께 누가 될까봐 조용조용 살금살금 산다는 청호 보살님! 때로는 공양주보살로 또 때로는 원주보살로, 그리고 동자승 덕표(초등학교 4학년)의 어머니가 되어 석굴암의 일체 살림을 챙기고 살피는 일을 아무런 대가 없이 지금까지 해왔다. 새벽 4시면 시작되어 잠들기 전에야 끝이 나는 절 살림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천일 기도 중이신지라 두문불출하시는 주지스님의 바깥 업무들도 보살님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복이라면 큰복인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스님을 이생에 만나 곁에서 시봉하고 그 그림자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석굴암이 불교와 인연하여 맺은 첫 절이요, 11년을 살아왔지만 ‘어찌 저러실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도일 스님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행을 그대로 행하고 계시다. 말씀이 그대로 행이고 행이 그대로 말씀이시다. 안과 밖이 똑같으신 분이다. 그러니 어찌 존경하고 따르지 않겠는가.
스님은 9살에 석굴암에 와서 길고도 긴 행자생활을 거쳐 11년 만에 사미계를 받으셨다. 그런데 30년 동안 은사스님이 입적하시기까지 단 한 번도 스님의 말씀을 거역해 본 적이 없다. 추상 같은 은사스님의 말씀이 바로 법이었기 때문이다. 은사스님은 신도들에게는 한량없이 부드럽고 자비로우셨지만 상좌인 스님에게는 엄격하신 분이셨다.
12살 때에는 마을에서 쌀 두 말을 지게에 지고 10리나 되는 소롯길을 오면서 지게가 길어 돌부리에 걸려 걸음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도 빨리 지고 오라는 스님의 분부에 마음 졸이며, 부처님전에 올릴 것이라 내리거나 쉬지도 않았다. 어른도 만만치 않은 왕복 20리 산길이었다.
“초안 큰스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하루도 빠뜨린 적이 없으셨습니다. 인사도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었지요.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꿇어앉으면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먼저 일어나는 법이 없으셨어요. 365일 하루같이 은사스님의 저녁 잠자리를 펴드리는 것 또한 주지스님의 일이었지요.”
은사스님이 열반하신 지 6년째가 되지만 스님의 방은 생전의 그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스님의 방문 앞에는 여전히 흰색 고무신이 놓여 있다. 스님의 효심은 그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을 것이다.
해인사 강원생활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석굴암 밖에서 주무신 적이 없으신 스님! 그리고 평생을 새벽예불 한 번 거른 적이 없고, 당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 쓰지 않으시면서도 말없이 소리없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행을 베푸시는 스님! 도일 스님은 새벽예불과 사시예불, 그리고 저녁예불, 하루 세 번 2시간씩 올리는 기도시간 이외에는 포크레인이며 덤프트럭 굴삭기를 직접 운전하며 흙을 돋워 평토를 만들고 축대를 쌓는 일들도 직접 해내셨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스님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한번 보면 척 해내신다. 사진도 잘 찍으시고, 대금도 잘 부시고, 붓글씨도 잘 쓰시고, 염불도 잘 하시고, 음식도 잘 하시고, 글도 잘 쓰시고, 말씀도 걸림없이 잘 하시고….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초파일 무렵 스님은 그 날도 덤프트럭을 운전하시며 복토에 여염이 없었다. 그런데 우당탕 쾅쾅! 갑자기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좁은 산길에서 작업을 하다보니 덤프트럭이 뒤집힌 것이다. 너무나 놀라 뛰어내려갔는데 스님은 우리들이 놀랄까봐 뒤집힌 트럭에서 바로 빠져나와 걱정 말라며 웃으시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헛 것을 본 줄 알았다. 덤프트럭은 곧바로 폐차되었지만 스님은 상처 한 곳 나지 않았다.
기운이 좋아서 그런지 석굴암 주위의 나무들은 유난히 짙고 푸르다. 게다가 어디서 어떻게 알고 왔는지 병든 개며 고양이, 산짐승, 그리고 죽어가는 까치까지 석굴암을 찾아든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스님의 손길이 닿으면 언제 그랬냐싶게 새생명을 찾아 제 갈길을 가곤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람한 산세 덕분인가. 아니면 스님의 기도의 힘 때문인가. 석굴암의 오랜 신도들 중에는 유독 기도가피를 입었다는 신심깊은 거사들이 많다. 신도회 임원진 17명이 모두가 거사님들이고 청년회 역시 마찬가지다. 절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가 거사님들이 도맡아서 한다. 봉사모임인 관음회 보살님들 또한 모두들 서서하는 봉사가 몸에 배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꾸밈없이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시는 주지스님에 대한 신도들의 믿음과 존경은 거의 절대적이다.
매월 셋째주 토요일 밤 10시부터 시작되는 철야법회 열기 또한 뜨겁다. 온 산이 신묘장구대다라니와 수구성취다라니, ‘나반존자’를 스님과 함께 염송하다 보면 온산이 쩌렁쩌렁 울리고 그 소리와 하나가 되다 보면 어느덧 새벽예불 시간이다. 밤 1시 무렵 먹는 간식의 순간 또한 즐겁다. 밭에서 캔 고구마며 감자, 옥수수. 철야정진에 동참하는 분들이 준비한 떡과 과일 등등… 그리고 올 여름에는 처음으로 어린이 불교학교와 중고등부 불교학교를 열 예정이다. 늘 줄 것을 먼저 생각하시는 스님은 벌써부터 아이들 줄 것부터 챙기신다. 절마당 앞 살구나무에서 딴 살구로 만든 맛있는 쨈을 보시며 아이들 주게 남겨 두라는 것이다.
천일기도로 영원한 숙원인 토지불사 해결을 낳았고, 2차 천일기도 중에도 잠시도 쉼 없이 가람의 중창불사를 해오시며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적인 일들을 남기고 계시는 천진불 도일 스님! 불가능해보였던 현실의 일들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을 눈으로 직접 체험하고 보아왔기에 그 믿음의 등불은 오늘도 꺼질 줄 모르고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인가 석굴암에 들어서면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쑥쑥 샘솟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