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갑니다

불광이 만난 사람/ 학산아트센터 학산 최기식

2007-10-06     관리자

“오늘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아기거위 네 마리가 탄생하고, 이북방송 확성기도 철수한다고 하고, 반디 보살 두 마리가 밤새 주유하더니 이렇게 반가운 분들이 오셨네요.”
진관사가 있는 진관외동을 지나고 일령유원지를 조금 지나 왼편 고가도로를 타고 얼마를 가다보면 절골이 나온다. 동네 어른분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1960년 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동네에 제법 큰절이 있어 절골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이 절골에 자리잡은 학산아트센터! 이 아트센터의 주인이자 부처님을 조성하는 불모(佛母) 학산 최기식(49세) 거사의 법명 겸 호를 따 그렇게 이름붙였다. 사실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아직 간판을 내건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그렇게 불러주는 것도 아니다.
문을 열어둔 것도 아니어서 아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다. 작업실겸 전시장겸 생활공간으로 쓰고 있는 가건물은 한때는 가구공장으로 쓰던 공간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기에 이름을 내걸 만큼 버젓하지도 않다.
눈이 오면 내려앉지 않을까. 비가 오면 새지 않을까. 거센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지 않을까 싶게 얼기설기 만들어진 가건물들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동으로, 나무로 혹은 흙으로 만든 불상도 불상이려니와 동판을 일일이 손으로 두들겨 만든 촛대며 향로·다기·연꽃으로 장엄된 등, 사리함… 마치 오랜동안 감추어진 보물창고를 보는 양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0여 년간 거의 문밖을 나가지 않고 작업한 부처님전 장엄물들이 이 방 저 방에 전시되어 있다.
평생의 화두이기도 한 ‘한국의 혼’을 생각하며 떠올린 작품들이지만 늘 불교의 테두리 안에서 빙빙 맴돌고 있다.
2~3년 전부터는 여가에 등잔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생 부모님께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것을 생각하며 아미타여래 앞에 놓아드리고 싶어서다.
공주가 고향인 학산 거사는 아마도 전생에도 불모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일본의 유명한 불모 오모리 선생도 학산 거사한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본 동경 지꼬 박물관에 소장될 사천왕상(1200년 전 작품으로 작자 미상)을 재현해냈을 때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전생에 당신이 조성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고 그대로 그려내고 미술에는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던 학산 거사는 1977년 불상을 조각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 모를 이끌림으로 불상조각을 시작했다.
그런데 부처님을 조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의 변화이기에 고행이 아닐 수 없다. 분출하고 싶은 감정들을 오히려 눌러야 한다. 그리고 나만의 부처님이 아니라 여러분의 부처님이기에 ‘나’는 없애야 한다. 부처님의 눈을 가리고 봐도, 입을 가리고 봐도, 볼만 봐도 부처님의 미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코는 숨을 쉬고 있는 듯해야 하고, 가사의 주름은 물흐르듯 하면서도 사이사이 공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형체가 없는 무생물에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불모의 역할이다.
“신라와 백제 때만 하더라도 6등신의 개념이 있었어요. 특히 석굴암 부처님은 다빈치의 해부학적으로 보더라도 비례가 완벽한 작품이지요. 인체공학적으로도 힘의 균형이 그대로 잡혀 있어요. 상하 좌우 앞뒤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무게 중심이 제대로 잡혀있어야지요. 그러나 고려와 조선으로 오면서 등분 개념이 없어졌습니다. 가사도 갑옷처럼 두꺼워지면서 등도 굽어졌지요.”
한때 우리나라 불상의 편안한 선을 찾기 위해 전국의 사찰을 돌기도 했다. 그리고 기도영험도량으로 유명한 곳도 빠짐없이 다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의 부처님은 역시 그 모습 또한 편안했다.
다른 작업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부처님을 조성할 때에는 잘하려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욕심을 부린 만큼 결과는 오히려 표시가 나기 마련이고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온갖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평상심으로 한다지만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것이 불상 조각이다.
2~3년 전부터는 순간순간 스치는 영감과 꿈속에서 미리 그려진 형상을 따라 작업을 하게 되었다. 밤을 새워 작업을 하다보면 새벽 2~3시경이 가장 영롱해지면서 만들고자 하는 형상에 대한 선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하다보면 되는 것이고, 하는 일을 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일을 해가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아무래도 경제적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그 동안 걸어왔던 길을 바꿀 수도, 돈을 쫓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국내 불교미술대전에서도 여러 번 수상 경험이 있지만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어 일본 동경 수운당(320년 된 일본 최고 불교미술갤러리)에 간 적이 있다.
(아미타불을 내어놓고) “지적해달라.”
“할 말이 없다.”
“얼마면 되겠는가.”
“팔려고 온 것이 아니다. 평가받고 배우고 싶어서 왔다.”
“….”
창씨 개명을 하고 일본으로 귀화하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후원회를 만들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 하필 불교미술을 고집하느냐. 돈되는 것을 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돈을 따라가다 보면 그 때부터 발목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명예를 따라가다 보면 역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 지쳤다. 전깃불이 끊어지고, 전화가 끊어지고, 아이들 학교 급식비를 못 내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묘련화 보살은 아무런 내색없이 묵묵히 학산 거사의 일을 거들어왔다. 주위에서는 식솔들도 챙기며 살라고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되돌아보면 어떻게 지금까지 이 길을 이렇게 걸어왔는지 모른다.
앞길이 막막할 때에도 “부처님! 갑니다.”하는 그 한마음으로 앞만 보고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 주위를 살피고 뒤를 돌아보았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이 “너 뭐하고 왔는가.”
했을 때 “부처님 말씀대로 정도의 길을 걸으며 최선을 다하고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정도는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프랑스 내 한국문화원에 소장된 관세음보살님, 수국사 대불, 화재로 소실될 뻔한 김해 은하사 명부전 보수불사, 구파발 연덕암 불사를 할 때에도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말자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다.
뉴욕 불광선원에는 휘광 스님의 인연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해 모셨고, 오는 8월 스님의 1000일 기도회향일에 모셔질 지장보살님을 조성 중이다. 그리고 11면 42수 관세음보살도 조만간 조성하게 될 것이다.
휘광 스님은 당신의 은사스님께 그렇게 배우셨듯이 불사를 돈으로 계산하지 않으시는 참으로 보기 드문 스님이시기에 오히려 더욱 정성을 쏟게 된다.
“오늘의 생각이 어제와 달랐듯이 오늘의 생각은 내일 가면 달라질 것입니다. 항상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기에 막막해질 때마다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부처님 일은 부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마치 때가 되면 알에서 깨어나는 새처럼 시절인연이 되면 저절로 회향도 되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부처님을 향해 나아갈 뿐이라고.
학산아트센터(031-855-5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