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해에 핀 초록 빛 꽃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전남 고흥 팔영산(八影山) 능가사(楞伽寺)

2007-10-06     관리자

연두, 연초록, 초록, 샛초록…. 산빛을 보다가 그만 말문이 막힌다. 눈으로 찾아낸 초록 빛을 구분하는 단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숫자로 헤아려보는데 그 수가 열이 넘는다.
능가사 대웅전 마당에 서서 또는 앉아 보면 팔영산(八影山)은 그대로 초록 꽃이 된다. 산꼭대기 바위도 초록이고 절마당도 초록이다.
유영, 성주, 두류, 칠성, 적취…. 팔영산 여덟 봉우리를 따라 한참을 오르락 내리락 하던 눈길이 드디어 대웅전으로 들어간다.
팔영산(608.6m)은 남도의 들녘을 내달려온 호남정맥이 금화산, 조계산을 넘기 직전 갯바람을 좇아 보성 땅을 에돌며 고흥반도에 이르러 우뚝 솟은 명산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산봉우리가 인상적이었는지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팔전산(八飼山), 팔령산(八嶺山) 등으로 부르고 있다. 스님들이 머물던 능가사(楞伽寺)의 옛 요사채 이름 또한 흘령료(屹靈寮)라 했다 하니 팔영산의 신령스러움을 스님들 또한 예사롭지 않게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땐가부터 팔영산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만경암중수기(1903년)」 등에는 중국 위(魏)나라 왕의 세숫대야에 팔봉의 그림자가 비추어 왕이 몸소 이 산을 찾아보고는 산이름에 그림자 영자를 붙여주었다고 전한다.
팔영산 기슭에 자리한 능가사(061-832-8090)는 한때 화엄사, 송광사, 대흥사와 함께 호남 4대 사찰로 손꼽을 만큼 그 사세가 웅장했다고 한다.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 지역이 백제 땅이었던 만큼 이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겠다. 이후의 능가사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데 전하는 말로는 보현사(普賢寺)라는 절을 능가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응진당 뒤에 있는 「흥양팔영산능가사사적비」는 부족한 능가사의 연혁을 비교적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는데 4m 가까운 높이와 이수에 조각한 용과 사자상 또한 온전하게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앞 안내판에는 몸돌에 새겨진 ‘숭정기원후재경오’라는 명문을 근거로 건립연대를 숙종 16년(1690)으로 밝히고 있는데 비의 글을 쓴 홍문관 부제학 오수채(吳遂采, 1692~1759)와 비에 새겨진 인물들의 활동 시기를 비교해 볼 때 그 건립시기를 18세기 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비의 내용을 보면 역시 아도 화상의 창건을 밝히고 있고 왜구의 침입으로 한때 폐사되었던 절을 인조 22년(1644)에 벽천 정현(碧川正玄) 대사가 중창하고 절 이름을 능가사라 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는 정현 대사의 중창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온다.
정현 대사가 하안거를 하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한 신승(神僧)이 나타나더니 “장부(丈夫)로 태어나 부처가 되기 어려우므로 마땅히 대공덕주(大功德主)가 되어 종풍(宗風)을 홍포(弘布)하라.”는 것이다. 이에 정현 대사는 광희(廣熙) 대사와 함께 산을 살펴보았는데 산의 남쪽에서 옛 절터를 발견하고는 전각과 요사채, 불상 등을 조성하는 대중창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정현 스님의 중창 당시만 하더라도 전각이 20여 동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 능가사는 대웅전, 응진당, 원음료, 사천왕문만이 팔영산 아래 너른 터에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만경암, 서불암 등 40여 개에 달하던 팔영산 내의 암자도 이제 몇몇 옛 터만 남은 채 그 자취조차 찾아 볼 수 없으니 화사하게 꽃핀 팔영산과 홀로 외롭게 서있는 능가사 대웅전을 앞에 두고 느끼는 안타까움이 더욱 크기만 하다. 대웅전 부처님께 두 손을 모아 능가사의 중흥을 기원하는 까닭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다포계 팔작지붕을 얹은 대웅전은 최근 해체보수와 단청을 새로 한데다 그 규모가 옛 영화를 말해주듯 웅장하여 보는 이를 압도한다. 좌측 뒤의 팔영산 바위봉우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 규모와 자태가 빼어나다.
전화기 속에서 ‘뭐 볼 게 있느냐’고 말씀하시던 보휘(普輝) 스님을 절마당에서 만나 뵙고 보니 일전의 데면데면함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 스님의 소탈함이었음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뉘엿뉘엿해지는 햇살에 서둘러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마침 원음료와 응진당이 모두 보수 중이다. 고졸(古拙)한 응진당의 멋스러움을 상상했던 터라 잠시 아쉬움이 스치는데 색도 벗어놓고 지붕도 벗어놓은 맨몸 그대로의 응진당 또한 쉽지 않은 볼거리인지라 위안을 삼게 된다.
응진당 뒤로 돌아서니 거대한 사적비가 나무 그늘 속에 묻혀 있고 돌담 한쪽에 시멘트 지팡이에 기대선 옛 부도 하나가 얼른 눈에 들어온다. 이곳 저곳 훼손이 되었는데 옥개석 귀꽃에 동물 형상을 표현한 것이나 대좌와 받침돌에 각기 다른 꽃과 동물을 깎아 놓은 정성이 예사롭지 않다. 어느 스님의 부도이길래 이렇듯 정성을 기울였을까? 흉물스런 시멘트 기둥과 응진당 보수 공사의 어수선함이 더하여 이름없는 부도의 아름다움이 위태롭게 서있다.
다음날 초록빛 봄에 취해 팔영산을 오르는데 사진기자는 대웅전 앞에 떨어진 동백꽃에 취해 일손을 놓아버린다.
휴일을 맞아서인지 상춘객(賞春客)들로 능가사와 팔영산이 떠들썩하다. 40여 분을 오르자 제 1봉을 오르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만경암 터를 볼 요량으로 우측 길로 접어든다. 다시 갈림길, 불과 50m 거리의 만경암 터에는 방치되어 쓰러진 돌담과 아무렇게나 자란 대나무가 무성하다. 사람들이 만경암 터를 찾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이유일 터이다.
유영봉에 올라서니 수십 명이 앉을 만한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뒤돌아보니 능가사 너른 터에 대웅전이 우뚝하고 저 멀리 크고 작은 섬들이 짙푸른 바다 위에 출렁인다.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의 한라산까지 들여다보인다던가.
‘저 바다에서 바라보면 이토록 아름다운 산에 촘촘히 박혀 있었을 암자의 불빛은 또 어떠했을까?’ 유영봉에 앉아 한동안 일어설 줄을 모른다. 초록 빛 성주봉을 줄지어 오르는 알록달록한 빛깔을 따라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