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38.토화라국이었던 발흐

신 왕오 천축국전 별곡 38

2007-10-06     김규현

혜초 사문의 “천 줄기 눈물방울…”

카불에서 기원전의 고도(古都), 발흐로 통하는 도로는 고대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동맥 중의 하나였다. 카불에서 230km 거리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 푸리쿰마리에서 실크로드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그 하나는 동북쪽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타고 가다 쿤두즈 - 바닥샨-와칸 계곡으로 해서 파미르 고원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마자리샤리프 - 발흐 - 우즈베키스탄이나 이란 고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어느 길을 택하든지 이 길은 중간에 힌두쿠시 산맥을 넘는 싸랑(Salang, 3,3368m)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현재는 다행히 가장 높고 위험한 고개마루턱에는 긴 터널이 뚫어져 있어서 그 속으로 차량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터널이라는 것이 꼭 무슨 방공대피소 같은 수준이어서, 눈이 쌓여 얼어붙은 고개 위로 기어가는 것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행히 가다서다를 반복하긴 했지만 하여간 버스는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와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야 아프간 최북단의 도시 마자리샤리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기원 전 수세기 동안 번창했던 고도 발흐 즉 토화라국의 수도는 지척이었다.

혜초 사문 때문에 우리에게도 토화라국, 즉 현재의 발흐는 의미가 있는 도시이다. 혜초는 바미얀국으로부터 북쪽으로 20일을 걸어 토화라국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때가 겨울이었던지 혜초는 그곳에서 한 겨울을 지내고 서쪽의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그리고 북쪽의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제국에 대한 견문도 넓히고 그 몇 곳은 직접 다녀오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백미로 꼽히는 시를 2수씩이나 읊은 곳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명작의 무대’인 셈이다. 그 한 수는 그가 한 겨울날 토하라에 있을 때 눈을 만나서 그 감회를 오언시로 읊었다는 것으로 완성도 높은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는 명작이다.

차가운 눈 더미는 얼음과 합쳐 얼었고 찬바람은 땅이 갈라지도록 매섭구나.
큰 바다는 얼어붙어 평평한 제단이 되고 강물이 낭떠러지를 자꾸만 깎아 먹네.
용문(龍門)에는 폭포까지 얼어붙어 끊기고 정구(井口)에는 얼음이 뱀처럼 서렸구나.
불을 가지고 땅 끝에 올라 노래하니 파미르 고원을 어찌 넘을 것인가.

또 한 수는, 그의 시 다섯 편 중에서 마지막에 해당되는 것으로, 혜초가 토화라국으로부터 동쪽으로 7일을 가면 호밀국(胡蜜國)의 왕이 사는 성에 이르러 그곳에서 서번(西蕃)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서 간략하게 넉자의 운자를 써서 오언시를 짓는다고 하는 부연설명을 달아 놓고 있다. 나그네만이 느낄 수 있는 여수(旅愁)는 오만 리 길을 혼자서 걸어 다녔던 강인한 혜초의 눈에서까지도 뜨거운 눈물이 나오게 하는지…. 하여간 그의 처절한 심정이 잘 배어나오는 작품이 아닐 수 없는 걸작이다.

그대는 서번(西蕃)의 길이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 길이 먼 것을 슬퍼하노라.
길은 거칠고 산마루에는 눈도 많이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 떼도 많구나.
새도 날아오르다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 지나가기 어렵구나.
한 평생 살아가며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천 줄기나 흘러내리는 구나.


토화라국(吐火羅國)의 수도 박트라 성

헬레니즘의 중심도시였던 발흐는 동서교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곳으로 그 기원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처음으로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세운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정복한 대륙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발흐도 바로 그 중 하나이다.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 박트라’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발흐는 이런 역사적 위상에 비하면 정말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시골마을로 변해 있었다. 마을의 중심에는 카와쟈파르사라는 퇴락한 이슬람 사원이 있는 원형공원이 있는데, 그 주위로 조그만 바자르가 역시 원형으로 형성되어 있고 상가와 민가가 역시 그 바자르를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너무나 단순한 구조의 마을이었다.
그 바자르를 한 바퀴 돌고나서 ‘해동의 나그네’의 입에서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 시골장터만도 못한 보잘 것 없는 곳이 바로 기원전에 기록인 사마천(史馬遷)의 『사기(史記)』에, “대하(大夏)의 인구는 많아서 1백여 만 명이며 그 도읍은 남시성[藍市城, Balkh]으로, ‘바자르’가 있어 각종 물건을 판매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 바자르란 말인가.

고풍스런 건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에 처음 한 동안은 혹 잘못 온 것이 아닌가? 하고는 몇 번을 재확인을 해보기도 했을 정도로 발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망연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려서는 자료에 있는 근교의 유적지이라도 찾아볼 양으로 찾아 나서기로 했다. 반나절을 대절한 고물차가 먼저 나그네를 데려간 곳은 라비아 발키(Rabi‘a Balkhi)라는 시인의 무덤이었다. 그곳 역시 외양으로는 너무나 볼품없는 곳이기에 바로 차를 딴 곳으로 돌리려다가 그 무덤의 주인공이 여인이라는 말에 번쩍 놀라 차에서 내려서, ‘여자가 대접받지 못하는 이슬람권에서 웬 여류시인?’ 하며 반신반의 하면서 자료를 세밀히 뜯어보니 관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우선 불교나 그리스의 고적을 찾아야 하는 것이 나그네의 당면한 목적인지라 다시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발흐 근처에서 옛 도시로 추정되어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진 곳은 발라히사(Bala Hissar)와 탁티루스탐(Takht-I-Rustam) 그리고 시내 입구에 보이는 남쪽 성벽 등이지만 제대로의 옛 모습이 보존된 곳은 하나도 없고 모두 그저 흙벽돌 무더기에 불과한 폐허 상태였다. 현장이나 혜초의 기록에 의한 토화라국의 도성으로 여겨지는 곳은 현재의 탁티루스탐 일원이지만 그곳 역시 폐허에 불과했다.

혜초는 이 성을 ‘박트라’라 부르며 무슬림의 침입으로 국왕은 동쪽으로 쫓겨 갔다고 하고는 아직 사람들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나 이미 이슬람 세력으로 편입되었다고 하면서, “왕이 사는 성의 이름은 박트라[縛底耶]이다. 지금은 대식국에게 진압되어 왕이 핍박을 받아 동쪽으로 한 달 걸리는 바닥샨(轝特山)에 달아나 산다. 그래서 이 땅은 대식국의 관할 하에 있다. (중략) 기후는 매우 추워 겨울에는 서리와 눈이 내린다. 국왕과 수령과 백성들은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 소승이 행해진다.”

그러나 한 세기 먼저 현장 법사가 왔을 때는, 발흐는 전쟁의 그림자가 전혀 없으며 기화요초가 피어나는 낙원처럼 묘사되고 있다. 3천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가람과 2백여 척이나 되는 스투파가 즐비했던 완전한 불국토였던지 현장은 이곳을 ‘소왕사성(小王舍城)’이라 불렀을 정도였고 또 이 나라에는 세 가지 국보〔불상, 불치(佛齒), 빗자루〕가 있어서 항상 외국에서 눈독을 드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장과 혜초 사이의 한 세기에 발흐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바뀐 것이었다. 불교전성시대가 지나서 이슬람화 된 다음에도 발흐의 상업도시로서의 잔광은 계속 이어졌지만, 그러나 1221년에 검은 폭풍처럼 몰아닥친 징기스칸 군대에 의해 천여 년의 번영을 구가하였던 이 영광의 도시는 초토화를 면할 수 없었던지, 역사는 그 날의 광경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말발굽이 일으키는 모래 먼지만큼이나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정오 무렵 태양은 검게 변했고 지축이 뒤흔들렸다. 그들이 가는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쓰러졌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