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은 굴신(屈身)이 아니라 굴심(屈心)이다

불광 30주년 연속기획 특집 /1인 1 수행법 갖기 | 절

2007-10-06     관리자

나는 어렸을 때 불교를 접했다. 하지만 그 때는 어머님이 우리집 뒷산에 있는 절을 가실 때 어머님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따라간 것 이외의 큰 감동은 없었다. 어머님이 부처님을 향해 절하면 그냥 옆에 앉아 있기도 서 있기도 민망하여 그저 엎드렸다 일어났다 한 추억뿐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온 나는 부모님이 보고 싶고, 또 사춘기의 말 없는 외로움, 고독 이러한 느낌들이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고, 소설을 읽으면서 되지도 않는 문학소년으로 시를 습작한다고 명동의 시인들이 모이는 다방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빵모자 쓰고 고즈넉히 평화스럽게 앉아 계시는 시인들의 여유와 안온함을 선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철학책을 읽게 되었고 1950년대 유행하던 ‘샤르트르’, ‘까뮈’의 작품을 읽게 되고, 그들의 작품기저인 실존철학서적들을 열심히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한 사람이기도 하다.
책 몇 권 읽고 신문에 실린 소개 내용을 가지고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열변을 토하면서 일장연설을 하고, 학과공부인 영어, 수학은 하지 않고 이런 것만 좋아했으니 어떻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 알 수 없다. 그 때는 모두가 지지리이도 공부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설 쓰고 시 쓰고 심지어 시나리오 현상모집에 응모한다고 야단법석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것도 아마 이미 부처님이 너는 불교를 하라고 미리 예약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하간 나는 고심고심 끝에 철학을 공부하려면 좀더 특성있는 철학을 해야 하겠다고 각 대학의 입학 요강을 살펴보았다. 동국대학교는 철학과가 불교대학에 있었다. 다른 대학은 문리과 대학에 철학과가 있었는데 유독 동국대학만이 불교대학에 불교학과와 철학과가 있었기에 두말할 것 없이 여기에 가면 불교철학을 할 수 있겠다고 믿고 응모하여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그 당시는 대학입학 합격자가 신문에 실리는 시대였다. 그러니 일간신문에 최초로 내 이름 석 자가 실리게 된 것이다. 참으로 복을 많이 받은 것이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불교, 유교, 서양철학이 ‘커리큐럼’에 조화롭게 구성되어 열심히 공부하였다. 무엇보다 불교학 개론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 그렇게 마음에 와닿을 수 없었다. 마음에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면 ‘제행무상’한 것 집착하지 말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도 취직도 되지 않고, 가세가 기울어지는데도 ‘무상, 무상’하면서 어려운 역경을 이겨나갔다. 만약 그 때 불교의 제행무상을 알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나도 모른다. 생각다 못해 군대에 가기로 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군대를 가지 않으면 어찌 남자라 하겠는가? 그런데 영장이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자원입대를 결심하고 육·공·해병대를 모두 시험쳤다. ‘사병으로 가면 누가 면회올 사람도 없고 그래도 장교가 되어서 자급자족 자립하자. 나이도 들었는데 언제까지 부모 형제에게 얹혀 살 것인가?’ 제일 먼저 발표된 해병대로 갔다. 다음에 합격할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 때 나는 「보현행원품」 프린트 본을 어떻게 해서 갖게 되었으며 그것을 읽으면 깨달음에 가깝고, 어려운 일이 잘 극복된다는 말을 들었다.
훈련이 끝나고 전방 관측소에 배치되어 관측장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보현행원품」을 읽었다. 신심을 내어서 읽긴 읽었으나 그 참뜻을 알듯, 모를 듯했다. 염념상속하여 예배하고 공경하라는 말씀이 이때만 해도 그저 관념적일 뿐이었다. 그저 감성적으로 다가와 좋을 뿐이지 그것을 내가 어떻게 실천수행할 것인지, 예배 공경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책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독서도 했으니 남에게 불교는 말할 수 있었고 나도 그것에 자신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군에서 제대하여 마침 모대학에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부처님의 은혜로 불교에 대한 신심이 더욱 고조될 때 대학생 불교연합회 학생들의 지도법사가 되기도 하고 그 대학의 불교학생회 지도교수가 되기도 하였다. 한 6년 잘 지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열심히 했는데 대학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 되었다. 잘못하면 직장도 잃게 된 것이다. 겨우 출판부장이라는 직책에 매달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시한 인생이 된 것이다.
그렇게 풍전등화의 운명에 있을 때 광덕 큰스님께서 불광법회를 창립하시어 나를 부르셔서 부회장과 전법위원장을 맡으라고 하셨다. 매주 목요일 법회에 열심히 가면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도반들과 더불어 한 달에 한 번씩 스님을 모시고 철야정진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 때 이전에는 관념적인 불교, 이론 불교, 입만 산 불교가 불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천불교를 통해 재발심하면서 매일 108배의 절을 하고 참회하기로 결정하고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절을 하고 있다. 그러나 5년 전부터는 무릎이 고장나 21배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절을 했는가? 우선 절을 하여 육신을 정복하여야 마음이 정복된다. 아무리 불교를 잘 알고 팔만사천 법문을 꿰어본들 목탁을 들고 염불삼매로 체험하지 못하고 절을 하여 육신을 굴복시켜 일심(一心)에 들지 않으면 그것은 사과를 수천 개 그리면서도 사과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수십년 동안 「보현행원품」을 읽었지만, 그리고 예배하고 공경한다고 했지만 예배는 절을 하는 것이요, 공경은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인지를 몰랐다. 절을 하지 않으면 예배의 의미도 모르고 공경이 나오지 않는다.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나는 당신을 공경한다.”하면 누가 그 사람의 행동을 참 예배 공경이라 하겠는가.
절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 말씀했다는 굴신운동이 아니라 바로 공경하기 위한 예비자세이다. 절을 하면 자연히 공경의 마음이 나온다. 그러면 과연 누구에게 예배하고 공경하는가?
“선남자여,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 세계의 아주 작은 티끌만큼 많은 수의 모든 부처님께 보현의 수행과 서원의 힘으로 깊은 믿음을 믿으며 눈 앞에 뵈온 듯이 받들고 청정한 몸과 말과 뜻으로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티끌만큼 많은 부처님이라 했는데 그것이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곧 인간이요, 유정, 무정의 중생이다. 다른 것은 모르나 모든 사람 하나하나가 그 근본은 부처라는 믿음을 내어 예배하고 존경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천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것인가.
절은 우리 마음과 몸을 공손하게 하며 부드럽게 만든다. 깨달음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부드러워야 한다.
“제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며 성문연각·보살지위 구함이 아니요, 오직 최상승을 의지하옵고 아뇩다라삼보리심을 냄이로다. 원합노니 시방세계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108예불 참회분의 발원문이다. 절을 해야 마음을 절복받고 마음이 절복되면 부처님의 길은 바로 거기에 있다. 절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절을 해서 무상보리를 이루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