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을 전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다 2

특별법석/ 금산사 회주 월주 스님

2007-10-06     관리자

광덕 스님이 반야심경에 있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인용해서 불자들에게 염송하게 했는데, 그 또한 대비원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다 알겠지만, 이런 얘기는 공개적으로 나한테 처음 듣는 얘기일 겁니다.
이 분은 ‘꿈도 아니고 생각도 아닐 때, 나는 무엇이냐?’라는 화두를 들고 참선해서 득력한 분인데 어째서 재가불자들한테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게 했느냐?
마하반야바라밀, 큰 지혜로 저 피안의 세계에 가자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만으로도 삼매에 들고 지혜가 얻어지고 깨달음의 경지, 피아(彼我)가 없는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토(穢土)가 정토(淨土)요,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요, 번뇌(煩惱)가 보리(菩提)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큰 지혜로 도피안하자는 것으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이 없는 불성(佛性)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광덕 스님께서는 경전에 있는 말씀을 간략하게 인용해서 수십만 명에게 영향을 주었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광덕 스님 본인은 화두 들고 참선 수행을 하셨으면서도 불자들에게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케 한 것은 큰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화두 수행은 어려워요. 저도 우리 스님한테 시심마(是甚陵) 화두를 받아서 지금까지 화두를 듭니다.
또 화두를 들고 참선 수행해서 확철 대오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자리가 부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화두를 들면서 일념의 경지에 들고 환희심을 느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심마 화두를 수십 년 동안 들고 있고, 지금도 수행 중인데, 이게 어려운 길이에요. 상근기가 깨닫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광덕 스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열어주기 위해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하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청화 큰스님도 염불선 하신다고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이 분의 상좌와 손주상좌가 200여 명이나 되는데, 한동안 이 분 상좌들을 선방에서 받아주지 않는 등 배척을 받았어요. 본래 청화 스님도 간화선을 한 분인데, 염불선을 하게 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어요. 우리 조계종 종헌에도 선(禪)이 중심이고, 『금강경』과 『전등록』을 중심으로 하고, 대승경전이 소의경전으로 되어 있지만, 참선·염불·간경·주력을 통해 다 수행하도록 되어 있어요.
94년도 개혁종단이 출범할 때 개혁회의(종회)에서 종헌에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또 뜻있는 젊은 학승들이 개혁회의에 참여해서 종헌 뒷부분에 통일, 인권, 복지, 환경 등에 대해서도 종도들이 관심을 갖고 실천해야 한다는 조문도 넣었어요. 종헌이 상당히 포괄적으로 발전된 겁니다.
그런데 청화 스님이 염불선을 통해 수십만 명에게 영향을 주면서도 변방에 계시다가 77세에 조계종 원로로 추대되셨고, 곡성 성륜사에서 81세로 작년에 열반하셨어요. 십이 년 전인가, 그분이 태안사 주지로 계실 때 제가 찾아가서, “근기가 약한 중생들을 위해 염불선을 지도하고 계시는데, 잘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한국불교는 통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만큼 중생들을 위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염불선의 기치를 드시라.”고 권고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총무원장을 역임한 스님이 찾아와서 염불선을 더욱 일으키라고 했다 하여 상당히 격려를 받았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광덕 스님 역시 큰 원력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게 했다는 것, 그게 다 불교교리와 수행에 바탕을 두고 하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켜드리고자 함입니다.
또한 포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광덕 스님은 한국불교에 희망을 준 분입니다. 정화 때 큰스님들을 만나보면 그 분들 하시는 말씀이 다 깨달아서 서산, 사명 대사 같은 분이 나오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식입니다. 도인이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포교당을 짓고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복지사업이나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큰스님들마다 수행 잘해서 도인이 나오면 부처님이 나와서 세상이 정화되듯이 된다는 얘기만 합니다.
비유컨대 한마디로 큰 범종을 만들어야 된다는 거지요. 하지만 산중의 큰 범종은 산자락까지만 들리는 데 그치고 맙니다. 그러니 작은 종도 많이 만들어서 전국 방방곡곡에 걸고 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듣도록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운동, 작은 종을 많이 만들어서 전국의 포교당에 많이 걸고 치자는 운동이 바로 광덕 스님이 주창하신 불교의 대중화, 현대화 운동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속에 파고들어 대중들에게 부지런히 법을 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은사이신 금오 큰스님께서도 “깨달아야 한다. 참선이 제일이다. 참선을 하지 않으면 내 상좌가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큰스님들이 그 때 다 그랬어요. 그러한 상황에서 광덕 스님이 다 나름대로 고민이 있어서, 불광회도 만들고 「불광」 잡지도 만들고 노래도 현대화하고 보현행원 운동도 하신 겁니다.
여러분께서는 오늘 단순하게 인연이 있기 때문에 추모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광덕 스님의 ‘전법이 구도’라고 하는 이 원력을 이해하고 보현행원 사상을 실천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광덕 스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고, 어떻게 중생들을 위해 교화했고, 무슨 원력으로 살았는지 알고 받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지비원만(智悲圓滿), 중생구제를 실천했던 광덕 스님의 원력과 사상을 받들고 우리가 열심히 실천하겠다, 더 확산시키겠다는 원력을 다지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대각사에서 열렸던 5주년 창립기념법회 땐가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 때 저도 참석해서 축사를 해주었지요. 그 날 탄허 큰스님께서 법문을 해주셨는데, “화엄경의 지증보살(智增菩薩)인 문수보살보다도 중생구제의 비원을 세운 비증보살(悲增菩薩)인 보현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더 위대하게 본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광덕 스님의 도심포교와 보현행원 실천을 찬탄하셨어요. 여기 박충일 거사도 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올해 30주년을 맞이하는 불광회가 광덕 스님께서 열반하신 뒤 답보상태에 있는 듯합니다. 지정 법주스님이 스님의 원력을 받들어 지금까지 노력해서 오늘날 반석 위에 올려놓고 안정을 시킨 것은 다행이라고 봅니다만,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안정에만 치우칠 게 아니라 더 발전해야 돼요. 옛날보다 인구가 배나 늘었잖아요. 광덕 스님의 원력을 받들어서 유지를 잇도록 바랍니다.
한편 사판(事判) 일에 있어서도 광덕 스님은 그 때 그 때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하셨어요. 벌써 24년 전 일이네요. 80년도 쿠데타식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의 정통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 정의 구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대중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당시 계엄사령부에서 공권력으로 무자비하게 수사, 아무 잘못도 없는 불교계를 유린한 것이 바로 10·27법난입니다. 그게 멀쩡한 사람 배를 갈라서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허겁지겁 배를 꿰맨 겁니다.
그 당시 제가 총무원장으로 있었는데, 그 때 죄도 없이 보안사령부 산하 수사처인 서빙고에 끌려가 23일 동안 구속되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어요. 저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50여 명의 스님들이 구속되고, 300여 명이 소환조사를 받는 등 비상시국이었지요.
그 때 신군부세력이 조계종 총무원과 중앙종회 등 종단의 중앙기관을 해체하고 타율적으로 11월 8일 정화중흥회의를 발족시켰습니다. 당시 정화중흥회의 의장은 박기종 스님, 상임의장 겸 총무원장은 박탄성 스님이셨고, 광덕 스님께서는 정화중흥회의의 일원으로 참여해서 종단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광덕 스님께서 정부당국과 협의해서 구속된 중앙종회의원들을 석방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종회의원을 석방시켜서 중앙종회를 열어 종헌개정정족수인 중앙종회의원 3분지 2 이상 동의를 받아서 종헌을 개정하여 중앙종회로부터 정화중흥회의가 합법적으로 종회의 권한을 인수 인계하는 절차를 밟고, 정화중흥회의가 권한을 승계하도록 조치를 취했지요.
그 때 만일 광덕 스님이 법리적인 안목을 갖고 합법적으로 인수 인계 절차를 밟지 않았다면 나중에 종권을 획득하려는 이들이 소송을 걸어오게 되면 종단에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사전에 방지해서 종단의 안정을 다지는 데 기여를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광덕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 총무국장 당시 1960년도에 5·16혁명이 일어났어요. 그 당시 통합종단이 발족되기 이전에는 대처승 종단으로부터 비구승 종단이 종권을 인수한 절차가 잘못되었다 하여 비구승측이 주도했던 종단과 사찰 주지들이 소송 80건을 다 패소했어요. 모든 일이 수속 절차가 적법해야 합니다.
그 때 효봉 종정스님을 모시고 종회의원 50명 중 비구승은 32명, 대처승은 18명으로 비구승이 주도권을 쥔 통합종단을 만들어서 종단의 안정을 찾는 데도 광덕 스님이 큰 역할을 했어요. 광덕 스님이 실무자로 참여하여 청담 스님, 경산 스님을 모시고 능가 스님과 함께 법률가들의 자문을 받아 불교재산관리법의 초안을 만들어서 국가의 입법기관(국가재건회의)에 통과시켰습니다. 그 뒤부터는 대처승측이 소송을 해도 비구승단이 주도하는 통합종단이 소송에서 다 이길 수 있었고, 불교재산의 손실을 막았던 것입니다.
훗날 불교재산관리법이 너무나 제약이 많아서 전통사찰보호법으로 바뀌었지만 처음 만들게 된 동기는 다 불교재산의 손실을 막고자 한 안목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그런데 통합종단 이후에 출가한 젊은 스님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교재산관리법은 정부에서 조계종단을 내정 간섭하는 잘못된 법이니 철폐하라’고 외쳤던 겁니다. 젊은 스님들이 경험도 없고 당시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승단은 용사혼잡이라, 용과 뱀이 함께 있어요. 극히 일부이겠으나 의식 없는 승려들이 불교재산을 마구 매도한다면 통제하기 힘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는 한시적으로 불교재산의 손실을 막기 위해 불교재산관리법이 필요했고, 이것을 고치려면 제도를 보완해서 법에 보장받는 법인체를 만들어야지 무조건 철폐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그래서 늘 중도적 입장에서 절차를 밟아서 대체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통합종단이 대처승측에서 비구종단과 사찰을 상대로 제기해온 소송 건들마다 비구승측에서 한 건도 패소하지 않고 승소하여 비구승이 주도적으로 종통을 이어서 한국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육사업, 포교사업, 역경사업, 복지사업 다 통합종단이 바탕이 된 것입니다.
저도 지난 일을 거울삼아 94년도 조계사 승려대회에서 개혁회의를 탄생시켜 혁명적으로 종권을 인수 인계해야 한다는 대중들을 설득하여 적법하게 종권을 인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 기성종회의원 3분지 2 이상 동의를 받아 종헌을 개정하여 기존 종회로부터 개혁회의의 권한을 인정받고, 개혁회의가 합법적으로 종권을 인수 인계하도록 노력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 제가 총무원장으로 재임했을 때나 그 뒤에도 제 후임인 두 총무원장을 상대로 종단에서 징계를 당한 일부 승려들이 소송을 걸어왔으나 다 막아내고 종단의 정통성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여기 당사자인 박충일 거사가 잘 알겠지만, 1972년 광덕 스님이 폐간될 뻔한 불교신문을 살렸다고 할 수 있어요. 석주 큰스님이 총무원장 하시던 시절, 광덕 스님은 총무부장이셨고, 나는 교무부장 소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언론기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모든 주간신문사에 자가인쇄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폐간하라는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정부의 신문 발행 제한 법령이 발표되고, 공무국을 설치하지 못한 신문사들이 줄을 이어 자진폐간에 들어갔어요. 당시 불교신문사는 재정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는지라 신문사 직원들의 월급도 제 때 주지 못하던 때라 자체 인쇄시설을 갖춘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신문도 도리 없이 폐간하게 되었는데, 광덕 스님이 신심 돈독한 박충일 거사에게 연락해서 신흥인쇄소 간판을 내리고 불교신문사 공무국 간판으로 바꿔 달게 하여 불교신문을 살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때 광덕 스님과 함께 당시 총무원장이신 석주 스님을 모시고 박충일 거사가 운영하는 신흥인쇄소에 가서 불교신문사 공무국이라는 간판을 같이 건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간판을 바꿔 단다고 하는 것은 법적으로 소유권을 신흥인쇄공사에서 대한불교신문사 공무국으로 명의 변경을 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한 결단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불교신문 폐간은 막을 수 있었지만 신흥인쇄공사는 상호가 바뀌고 법적 명의가 넘어가면서 그 동안 해오던 정부관련 인쇄물의 입찰 자격도 상실하는 등 몇 해 동안 손해가 막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공덕으로 신흥인쇄는 크게 번창했고, 하산 박충일 거사는 현재 인쇄업계의 수장(대한인쇄협회 회장)이 되어 한국인쇄문화산업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산 박충일 거사가 그 쉽지 않은 마음을 낸 것이 다 광덕 스님과의 인연 덕분이니 불교신문을 폐간 위기에서 광덕 스님이 살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광덕 스님이 수행 포교뿐만 아니라 사판(事判), 즉 행정적으로 종단을 위해서 기여한 바가 많은데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광덕 스님은 이사(理事)를 겸비하시고, 지혜와 자비를 원만히 갖추신 분으로 평생 동안 보현행원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광덕 스님의 수행정진과 원력을 받들어서 실천하기 바라고, 열반 10주기 추모법회 때 법문을 해주려고 생각하는데, 그 때는 여기다 10배 정도 불광회 회원들이 늘어야 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은 원력을 가지고 불광의 등불을 밝히고 수많은 중생들에게 불법을 전해 주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