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불교] 아야 케마

서양의 불교

2007-10-06     관리자

아야 케마는 1923년 독일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거쳤다. 이후 결혼하여 자녀를 둔 그녀는 다시 한번 56세에 출가하여 삶의 대전환을 시도한다. 불교계에 기여하긴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닐까 혹자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마 스님은 이후 20년간 스리랑카에 비구니섬을 건설하고 비구니와 여성불자들의 모임인 샤카디타를 출범시키는 등의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38년 15세 때 나치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200명의 유태 어린이 피난단에 섞여 영국으로 피난을 갔다. 2년 후인 1940년 샹하이로 가 그 곳으로 피신했던 부모와 합류했지만 곧이어 2차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스님의 가족은 일본인들에게 잡혀 또다시 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되었고 그 안에서 아버지가 사망했다.
미군의 승리로 풀려난 스님 가족은 얼마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잠시 평화롭게 남들처럼 살던 케마 스님은 60년대에 남편과 함께 히말라야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을 돌아다녔는데 그때 명상을 배웠다.

스님은 마음속 깨달음으로 가는 정확한 길과 지침을 찾기를 늘 원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것을 찾지 못했었다.
1973년 50세가 된 스님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국인 칸티팔로 비구를 만나 드디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실천적인 깨달음의 길을 발견했다. 수행에 방해가 되는 다섯 가지 장애가 무엇인지 배우고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서 하나하나 제거해 가면서 희열을 느꼈다. 3년 후 칸티팔로 스님이 함께 가르침을 펴자고 권유하자 기꺼이 합류하였다.

그리고 1978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비교적 초기의 절에 속하며 서양인들이 수행할 수 있는 수행센터인 왓부다다마를 칸티팔로 스님과 함께 설립했다.

1979년 56세에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사미니계를 받고 니안포니카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것이 일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었다고 말하는 스님은 사미니계를 받은 후의 해탈감과 안도감을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졌다. 예뻐질 필요도, 매력적일 필요도, 재미있는 사람이 될 필요도, 부자가 될 필요도 없어졌다. 다만 가사를 걸치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가사를 입은 나는 그저 사람일 뿐이다. 누가 나를 좋아한다면 좋은 일이다. 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문제될 게 없었다.”

1987년 로스엔젤레스의 중국계 절인 시라이(Hsi Lai)사에서 비구니계를 받은 스님은 1989년 독일에 붓다 하우스를 설립해 원장이 되었으며 1997년에는 독일 최초의 숲 속 승가인 메타 비하라를 뮌헨에 설립하여 독일어로 비구니계를 집전하였다.

아야 케마는 많은 비구니 제자를 키웠고 여성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여성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기에 1987년 세계 최초의 비구니 국제 대회를 조직하여 개최했다. 달라이 라마가 기조연설을 한 이 대회로 인해 세계 여성 불교 단체인 샤카디타〔Sakyadhita, ‘붓다의 딸들’이라는 뜻〕가 탄생했다.

그 해 5월에는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유엔에 초청되어 불교와 세계 평화에 대해 연설을 하였다. 또한 그 해 스리랑카의 비구섬 바로 옆에 ‘파푸두와 비구니섬’을 설립하여 서양 여성들이 기거하며 수행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였다.
비구니섬을 설립할 때 스님은 남성들의 횡포에 가까운 저항과 맞서 싸워야 했다. 처음에는 비구니섬이 비구섬에 너무 가까워 비구들이 헤엄쳐 건너올 수 있으니 안 된다고 반대했다.

스님은 비구들이 건너오기도 어렵겠지만 설사 건너온다 하더라도 비구니섬에 닿을 무렵에는 이미 너무 피곤해서 무엇도 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응수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산적들이 와서 도적질하고 여자들을 강간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스님은 시원한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여기 비구니섬의 서양 여자들은 체구가 토박이 산적들의 두 배는 될 걸요.”

1987년 미국의 UC 버클리에서는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개최했다. 12일간 밤마다 1시간씩 1개의 강연을 했는데 이 중 11일은 남성들이 발표했고, 하루만 여성들에게 돌아갔다. 그것도 그리스도교도 2명, 불교도 2명으로 4명의 여성이 발표자였으니 한 사람에게 15분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오자 스님은 ‘강연료는 1사람 것을 내고 4사람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여러분은 복도 많다’고 청중에게 농담을 던졌지만 실은 종교계에서 여성들에게 실어주는 비중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물론 주최측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80년대 말 가장 발달되었다는 나라인 미국에서 그런 일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페미니스트로서 우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르마는 모국어로 배워야 하며 명확한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 또한 가르침의 과정에서 가르침의 정수가 흐려지면 안 된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전법자가 사람들의 생각에 맞추려 하고 사회적 인정을 구하려 할 때 해탈로 이끌어야 할 다르마는 그 장엄과 광휘를 잃게 된다.

사회의 목적이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가 되려 하는 것임에 반하여 해탈의 길은 놓아버리는 것이며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갈망에 영합한 희석된 불교는 부분적 진리만을 담고 있는 심리극, 정신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쓰이는 심리극이 되기 쉽다.”고 케마는 경고했다.

쉽고 아름다운 말과 문체로 사람들의 가슴에 다가서는 아야 케마는 영어와 독일어 저술이 25종에 이르며, 이 중 일부는 7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1987년에 출간된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삶(Being Nobody, Going Nowhere)』은 크리스마스 험프리 상을 받았다.

유방암에 걸려 세상을 뜰 때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내 삶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과정’이었다고 말한 스님에게 수행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수행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온 몸과 온 마음일 뿐이다. 조금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