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봉하는 마음으로 대중을 모시고 삽니다

우리 스님/법보종찰 해인사 주지 세민 스님

2007-10-05     관리자

“개인의 욕심을 버리면 편안합니다. 특히 부처님 일은 삿된 마음이나 개인의 이익이 개입되면 안 되지요. 늘 내 범위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절대 무리해서 무슨 일을 도모하거나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일만 해왔으니 당연히 안 되는 일이 없었지요.”
세민 스님은 지난 2000년 11월 해인사 주지소임을 맡았을 당시만 하더라도 참으로 난감한 일들이 많았다. 선방과 강원, 율원의 출가대중 200명에 재가 종사자들까지 합치면 300명이 넘는 대중들이 사는 법보종찰 해인사의 주지소임을 맡는다는 것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닐 뿐더러 살림을 도맡아 산다고 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심에서 살아온 스님이 어떻게 산중의 대중들과 함께 어려운 살림을 살겠느냐는 것이었다. 사찰 재정 또한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주로 안 되는 쪽으로 중지가 모아지며 반대도 심했다. 주지 소임 6개월도 못 채우고 나갈 것이라고들 했다. 그 동안 대중들과 함께 살아왔던 것도 아니고, 사실 난감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출가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들었던 영암 노스님의 법문 말씀이 문뜩 떠올랐다.
영안 노스님께서 불교정화 이후 대처승들이 물러간 해인사에 와 보니 절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전답은 이미 소작인 손에 다 넘어가 있었고, 당장 대중들이 밥을 굶어야 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을 굶기지 않고 살까를 생각하신 노스님은 장경각에 가서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너 배운 대로 먹고 살아라”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어산을 하셨던 스님은 팔만대장경 정대불사를 발원했다. 그것이 1958년이었다. 스님의 염불기도는 대성황이었고 정대불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민 스님은 노스님의 법문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염불독경공양’으로 천도재를 올려드려야겠다는 원을 세웠다.
1000일기도하는 마음으로 49재를 21번(합하면 1029일)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전국에서 생각보다 많은 불자들이 동참했다. 평소 스님의 염불 독경테잎을 들었던 불자들을 포함해 5000명이 넘는 불자들이었다. 회향식에는 7000명이 넘는 불자들이 동참했다. 그 동안의 염불공덕이 큰 도움이 되었다.
“늘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살펴 그것을 해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주지는 대중들의 뜻을 받드는 심부름꾼입니다. 일반 재가불자들뿐만 아니라 대중스님들이 원하는 것을 해드리면 되는 것이지요. 공부하려고 애쓰는 젊은 스님들을 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주지라고 해서 절대 군림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스님은 선방스님들을 위해 선방을 다시 지었다. 아무래도 콘크리트로 된 건물은 기가 차단되고 순환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120평 선방은 우리 나라에서 최고로 좋은 홍송으로 지었다. 선방 사면을 둘러 포행할 수 있는 마루도 실내공간에 마련했다. 지대방은 아예 없앴다. 스물네 시간을 그대로 앉아도 되게 되었다.
새로 지은 선방에서 공부해본 수좌스님들이 예전에 공부하던 것에 비하면 삼분의 일도 힘이 안 든다고 했다. 일주일간 철야정진을 해도 힘드는 줄 모르겠다는 말에 정말 잘 했다 싶으시다고.
조사전을 잘 지어 흩어진 진영들을 한 데 모셔드리고, 오래되어 낡은 요사채를 수리하면서 구들을 다시 놓고 보일러 시설을 해서 사용 가능한 방사를 두 배로 늘렸다. 게다가 사회복지법인 자비원(무료 양로원)을 인수하고, 진주 장애인 복지관을 시로부터 수탁하였으며, 아직은 완전한 권한을 인수받지는 못했지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해인사) 미타원(납골당)을 3년 후 인수받게 됨으로써 모름지기 수행과 문화, 그리고 복지를 펼치는 도량으로서 해인사가 거듭나게 되었다. 해인사가 출가 스님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도 그 역할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종찰로 스님들을 위한 수행공간이다. 그러나 매년 3월 정대불사와 9월 수계산림법회, 그리고 초파일 신도들을 위한 특별법회가 열릴 때마다 일반신도들로 인해 도량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신도들을 위한 법회를 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자운 노스님, 성철 스님을 비롯해 현 종정스님에 이르기까지 역대 큰스님들께서 일반신도들을 위한 신행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해인사에서 직선 거리로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해인초등학교 자리에 공간을 마련하자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이야기였다. 출가수행자뿐만 아니라 사부대중이 함께 수행하는 도량으로 가꾸자는 것이 그 취지다.
세민 스님은 그 일을 하기로 원을 세웠다. 스님은 지난 해 11월 3일 1029일 영가천도법회를 다시 입재하면서 해인사 동판 팔만대장경 조성을 발원했다.
지난 해 지하철 참사를 보며 이 일이 더 이상 미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선조들이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국난을 이기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했던 그 마음으로 팔만대장경 동판본을 조성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세계문화유산인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7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유산이지만 나무의 수명이 한계에 달하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훼손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 늦기 전에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문화유산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7차에 걸친 몽고의 혹독한 외침으로 국가가 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되어 한 자 한 자씩 정성껏 담아낸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국민화합의 원천이자 국난극복의 큰 원동력이 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보면 비슷한 시기입니다. 경제적으로 성장했다고는 하나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정치가들은 동서로 갈라져 있고, 중국의 고구려 문제, 일본의 독도 문제, 그리고 미국의 압력에 이르기까지 비참한 국가 현실 앞에서 우리의 정신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숨결과 함께 해온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인 해인사 목판 팔만대장경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고 그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해인사 팔만대장경 동판 복원불사는 우리 국민의 민족적 과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현재 팔만대장경 목판본이 봉안되어있는 장경각은 보존을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동판대장경을 제작해 현재 설계 중에 있는 ‘신행문화도량’에 봉안해 누구나 와서 보고 만지고 인경(판을 인쇄함)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1만 년은 보장할 수 있는 재질로 판을 만들고, 그 모양 또한 이 시대 최고의 문화 예술품으로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현재 한국과학연구원(KIST)을 비롯하여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 개발되고 있으며, 이 달 말쯤이면 그 모양이 드러날 것이다.
금속공예가 김승희 교수(국민대 조형대학), 건축가인 정기용 교수(한국 예술종합학교), 이상해 교수(성균관대 건축과), 조성룡 건축가(도시건축대표),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과 교수인 프란시스코 사닌, 금속조각가인 이영학 씨, 청주 고인쇄박물관 나충희 연구원, 재단법인 아름지기(문화재보호단체) 신연균 이사장 등이 자문위원들이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일단 고려대장경의 오탈자 부분(훼손 또는 처음부터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일본의 신수대장경이나 중국의 대장경에는 수록돼 있으나 고려장경에는 없는 『지장본원경』 등의 경전들을 보충하는 일, 또한 우리 나라 원효, 의상 등 스님들의 어록 등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러면 경판 수는 자연히 더 늘어나게 된다.
이미 고려대장경 연구소(소장 종림 스님, 세민 스님의 사제)에서 전산화 작업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조사된 내용이 있고 이번 기회에 다시 위원회를 구성해 확정지을 계획이다.
지난 해 11월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팔만대장경 동판복원불사 고불식’에는 700~800명을 예상했는데 3000명 이상이 참석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룡 목사가 영상메시지, 혹은 축전을 보내왔다.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니만큼 불교계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사업으로 일을 전개해갈 예정이다.
지금까지는 해인사 주지 소임을 맡고 계신 세민 스님의 크나큰 원력으로 어렵지 않게 모든 불사들이 술술 잘 이루어지고 있지만 워낙 큰 대작불사인지라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스님은 부처님 일이니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저 편안한 웃음을 지으신다.
방장스님을 위시해서 여러 어른스님들이 계시고 또 산중회의도 있느니만큼 늘 그 뜻을 받든다는 마음이기에 별 어려움이 없으시다고,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지만 다 되는 것입니다. 총무원 소임(재무부장) 살 때도 늘 시봉하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아무리 큰 소임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의 뜻에 따라 시봉 잘 하면 되는 것이지요. 모든 일들은 그저 순리대로 하고 대중들이 환영하는 일을 해야 해요.
부처님 일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법을 전한다는 것은 최상의 공덕이 됩니다. 세상에 공 것은 없어요.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공덕이 되어 무량대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당장 눈 앞에 대가가 없더라도 베풀면 반드시 엄청난 대가로 돌아옵니다.”
우리 스님 세민 스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절로 힘이 난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상’을 드러내지 않으셔서인지 참 편안하다. ‘21세기 팔만 대장경 조성’이라고 하는 대원력을 가지고 계신 스님은 일에 있어서도 당신의 음성만큼이나 시원시원하고 걸림이 없으시다.
4,800만 가량 되는 인구 중 우리 시대 대작불사인 팔만대장경 조성(85,000여 장)에 동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부처님 말씀을 새긴 경판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서 만 년 이상을 전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인연인가. 뜻있는 불자들의 수희동참(문의 전화 055-934-3105)을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