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바람직한 방안

불광 30주년 기념 연속 기획 특집/1인 1 수행법 갖기

2007-10-05     관리자

몇 달 전 미국의 「타임」지가 ‘명상 및 수행 붐’을 커버스토리로 다룬데 이어, 「뉴욕 타임즈」는 지난 수세기 동안 세계 발전에 영향을 미친 서양 종교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최근들어 「볼티모어 썬」지도 “불교가 합리적인 종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백인 주류 사회에 급속히 확산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고 상세히 다루었다.
서구의 이러한 명상 및 수행 붐은 물론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정보화 시대를 지배하는 엘리트로서 ‘보보(Bobo, 부르주아 보헤미안)’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데이비드 브룩스가 ‘정신적 수련’을 추구하는 이런 흐름을 1850년대 금맥을 찾아 서부로 몰려가던 골드러시에 비유해 ‘소울 러시(soul rush)’로 명명했듯이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러한 ‘소울 러시’는 이미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바쁜 도시민들이 깊은 산속의 수련원이나 도심의 선방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 곳에 숨가쁜 도시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줄 청량제가 있고, 끊임없이 벌어들이고 그만큼 소비해야만 하는 현대 사회의 집착과 번뇌를 녹여버릴 해독제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수련단체로 알려진 단학선원의 경우만 해도 전국 3,000여 곳에서 수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식 회원은 10만 명이지만 단학을 거쳐간 사람은 100만 명에 이른다. 단학선원을 포함해 국내의 명상 및 수련 인구는 최소 300만에서, 최대 5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내 심신수련 문화의 확산은 국적 불문에다 종교적 배경도 개의치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불교의 참선이나 위빠사나, 힌두교, 도교의 선도(仙道) 수련 등 전통 수행법을 변형시킨 각종 수련법이 대두하고 있다. 초월명상, 마인드 컨트롤 외에도 오쇼 명상, 아난다 마르가, 산트마트 명상, 라자요가, 아봐타 프로그램 등 인도의 힌두식 수련법이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가 체계적인 프로그램으로 완성돼 한국으로 수입된 것이 대다수이지만, 파룬궁처럼 기공의 원조를 내세우는 중국의 수련법이 직수입된 경우도 있다.
이처럼 주변에서 쉽게 수련법을 접할 수 있게 되다보니, 이제는 ‘깨달음’도 기호에 따라 선택하는 하나의 문화상품이나 다름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왜 수행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이 질문 자체가 수행의 목표를 암시하고 있기에, 바른 안목으로 정법에 맞는 수행법을 판단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재가자 수행문화의 현황을 파악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모든 불자들의 공통된 화두이기도 하다.
인도에 필적하는 ‘종교 백화점’의 나라로 꼽히는 국내의 복잡한 수행문화를 논하기에 앞서 살펴봐야 할 것은 한국불교의 특징을 짚어보는 일이다.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처럼 종파 위주의 수행법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수행법의 통합적인 경향에 대해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조계종의 종지 종통에 맞는 수행법은 간화선이지만, 조계종 사찰에서는 참선 이외의 다른 수행법 즉, 기도와 주력, 염불, 독경, 참회와 절 등 다양한 방편들이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매년 안거에 동참하는 2천여 스님 가운데에서도 간화선이 아닌 염불이나 위빠사나를 닦는 스님이 적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재가불자들 역시 간화선을 비롯해 염불, 위빠사나, 간경, 사경, 절 등을 구분하지 않고 공부하고 있다. 구참 불자들은 하나의 수행방편으로 매진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은 사찰과 스님, 도반의 인연에 따라 시시각각 다양한 방편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재가불자의 공부법에 대한 현황조사는 실시하기도 어렵거니와 의미있는 결과를 얻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통불교적인 수행관은 불교 유사 수행법에 대해서도 매우 관대하거나 무관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불교 유사수행법은 동양의 전통 수행법인 불교, 힌두교, 도교 등의 수행법에서 파생된 것임에도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보니 아직까지 불교 수행법과의 차별성과 유사성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대표적인 몇몇 불교유사 수행법 정도만 윤곽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초월명상(TM)과 다양한 요가수행법은 힌두교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며, 국선도와 단학 등 단전호흡법은 주로 도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마음수련과 파룬공은 불교와 도교적 성향이 강하고, 아봐타는 힌두교와 불교, 현대 분석심리학의 연구성과들을 종합응용한 수행법이다.
그리고 동사섭법회와 정토수련원의 ‘깨달음의 장’ 수련은 불교적 입장에서 현대 실존주의 심리학 등의 이론을 응용해 현대인들의 요구에 맞게 프로그램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수행법 홍수시대’에 나타난 불교 유사 수행법들은 전통 수행법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계기도 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간화선의 경우, 이제 이 시대에 걸맞는 수행체계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중국에서 송대에 이르러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서 조사선이 간화선으로 본격적인 재정비를 했듯이, 한국의 선수행 기풍도 새롭게 탈바꿈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한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다시 생각해 보고 현재의 제반 수행법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987년. 거해 스님의 안내로 미얀마의 우빤디따 스님이 그의 스승 마하시 스님이 체계화한 위빠사나 수행법을 한국에 소개하면서부터다. 위빠사나는 아직 보급 단계에 머무르고 있으나 동남아에서 비구계를 받거나 수행법을 익히고 돌아온 스님과 불자들이 지난 2~3년 사이에 선원이나 명상센터를 잇달아 개설, 현재 수행기관만 20여 곳에 이른다. 최근 보리수선원, 연방죽선원, 천안 호두마을, 김해 다보선원 등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정진한 불자는 2만여 명, 매주 한 차례 이상 정기법회에 참석하는 수행자만도 5천여 명에 이른다.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한 근본불교의 보급은 언론에 의해 ‘간화선 위기론’으로까지 비춰지기도 했지만, 간화선이 근본불교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정체된 수행풍토를 되돌아보는 자성의 기회가 되고 있다. 일반 불자는 물론 많은 스님들이 위빠사나와 불교 유사 수행법을 찾는 까닭도 참선, 간경, 염불, 주력 등 불교의 4대 수행법이 체계적 가르침을 주지 못한 데 따른 현상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은 간화선의 선지식 부재와 이로 인한 지도점검 문화의 쇠퇴, 잘못 이해한 사교입선(捨敎入禪) 전통으로 인한 체계적 교육의 부재, 재가 수행자 양성 소홀, 기복불교의 방치, 간화선의 대중화 실패 등을 수행법 난립의 요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 수행법의 전반적인 위축에도 불구하고 간화선의 미래는 어느 때보다도 낙관적이다. 해마다 조계종 90여 선방의 2천여 수좌를 비롯 천태종, 태고종 소속 스님 등 3천여 스님들이 ‘화두(話頭)’를 들고 안거(安居) 수행에 드는 것이 이를 웅변해 준다.
이에 뒤질세라 3천여 재가자들도 전국 30여 시민선원에서 안거 수행을 하고 있다. 평상시 전국 50여 시민선방에서는 직장인, 주부 등 재가 선객으로 붐비고 있으며, 사찰수련회동문회 회원들의 참선 붐도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선지식 및 지도점검 시스템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한 문답식 법회와 정기 점검, 선어록 공부 등 조사선의 전통 공부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어 간화선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0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 검증된 탁월한 생활 수행법인 간화선, 중국과 한국에서 수많은 선장(禪匠)들을 배출한 조사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최상승 수행법으로 각광받기 위해서는 오늘의 시대에 맞는, 오늘의 언어로 풀어낸 ‘수행체계’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즉 놀 때나, 일할 때나, 수행할 때나 늘 평상심(平常心)을 쓸 수 있는 생활선이 되어야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염불이나 위빠사나 등 다른 전통 수행법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수행문화에 노출된 재가불자들 역시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연기, 공 등의 불교교리를 바르게 알고 실천해야 한다. 쉽고 편한 방편에 솔깃하기보다는 스스로 지혜와 자비를 성취해서 쓸 수 있는 눈밝은 수행자가 되어야만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