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불교] 지유 케넷(Jiyu Kennet) 선사

서양의 불교

2007-10-05     관리자

선불교가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로 가면 용어나 색채가 아무래도 그쪽 분위기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좀더 서양에 맞는 불교를 만들자는 개혁을 시도한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조동종의 필립 카플로 선사는 그런 시도로 인해 스승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전법을 받지 못하고 말았지만 조동종의 비구니 지유 케넷 선사는 단순히 개혁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독립종파를 창조했다.

영국에서 태어난 지유 선사는 1962년부터 9년간 일본에 체류하며 총지사의 고호 방장스님 밑에서 공부하여 견성을 인가받고 전법을 받았다. 그는 고호 선사가 입적한 후 1970년 미국으로 가 캘리포니아 주에 샤스타 수도원(Shasta Abbey)을 설립하고 불교명상종(Buddhist Comtemplative Order)을 창립하고 3년 후에는 영국 중북부의 노섬버랜드에 트로셀홀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가 설립한 불교명상종은 다른 종파와 별로 교류를 하지 않으며 여타 승원에서 행하는 불교와 많이 다르다. 독경을 할 때는 영어로 하며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박자와 멜로디가 있다. 스님들의 법명은 일본식이 아니고 영국인들의 고대 이름인 에드문드(Edmund), 기포드(Gifford) 등이다.

사원을 지칭할 때는 ‘승원(monastery)’이 아니라 카톨릭 수도원을 지칭하는‘abbey, priory’를 쓴다. 또한 비구와 비구니의 호칭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그저 ‘monk‘라고 부르고 있다. 선사의 호칭도 ‘선사(zen master)’나 ‘노사(roshi)’를 쓰지 않고 ‘목사(reverend)’에 ‘master’를 합쳐 ‘reverend master’라고 부르고 있다. 지유 선사는 이런 변화가 문화권에 적응하기 위한 편리한 방편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한다.

지유 선사는 조동종의 본산인 총지사의 고호 방장스님이 그 가능성을 인정하여 제자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직접 견성을 인가하고 법을 전해준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조동종 내부에서는 외국인이며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질시를 받았다. 그리고 조국인 영국의 영국불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험프리 회장이 ‘진짜 스님(일본인 비구가 아니라는 의미)’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성을 거부당했다.

고호 방장스님이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유 선사를 키운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고호 선사는 서양으로 불교를 전법할 준비를 하며 그 주역을 담당할 인물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불교가 서양인들에게 가닿으려면 일본에서도 그랬듯이 서양인들 스스로 거기에 색칠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서양에서 새로 태어난 불교는 동일한 진리의 흐름을 담고 있기에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요, 새로운 형식과 방법, 관습, 문화를 형성할 것이기에 완전히 옛것도 아닌 것이다. 서양이 준비가 되었을 때 찾아낼 진정한 스승은 일본에서 공부한 서양인일 것이다.

페기 케넷(Peggy Kennet)이라는 이름으로 1924년 태어난 지유 선사가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아시아의 등불(The Light of Asia)’을 읽은 것이다.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 강당 벽난로에는 작은 불상이 하나 있었는데 마음이 괴로울 때 그 불상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장학금을 받는 한편 아르바이트를 하며 트리니티 음악대학을 졸업한 지유 선사는 1954년 영국불교회 회원이 되어 불교를 가르치던 중 그 곳을 방문한 고호 선사를 만났다.

총지사에서 공부하던 시절 지유 선사는 때로는 짖궂고 때로는 악의적이기까지 한 장난의 대상이었다. 발코니에서 한 스님에게 떠밀렸다가 다른 스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함께 할 도반 하나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어려운 일이 계속 일어나자 어느 날 밤 지유 선사는 아예 짐을 싸서 길을 나섰다. 그런데 내면의 소리가 속삭이는 것이었다. “네가 틀렸을 수도 있잖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발길을 돌린 지유 선사는 이후 ‘일상의 삶’을 화두로 받아들였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삶과 죽음이 주는 유한성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고통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총지사에 있던 그 시절에도 지유 선사는 페미니스트였지만 그 접근법이 여타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랐다.
“모든 여성들이 마치 자신들은 권리가 없다고 가정한 듯 그리고 오직 남성들만이 그 권리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는 빼앗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성들은 이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권리를 취하기만 하면 된다.”

지유 선사가 총지사에 있을 때 일본 내 한국인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에 매우 분노한 적이 있다. 지유 선사는 어느 날 1500년대에 일본이 한국의 왕실 도공들을 납치해다가 도자기를 만들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개탄한다.
“바로 거기서 나온 스타일이 오늘날 전세계에 일본 고유의 것이라 떠들고 있는 ‘일본’ 도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 떠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후손이 아직도 일본에 발이 묶여 여권도 주지 않고, 시민권도 주지 않고 공립학교도 갈 수 없고,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로건설 노동밖에 없다니. 그런데도 총지사에서는 세상이 한마음이고 경이롭다느니, 일본이 외국인들을 사랑한다느니 하는 위선을 벌이고 있다.

오늘 나는 거리를 걷다가 순박해보이는 한국 여인들이 쭈그리고 앉아 타르와 삽으로 아스팔트 보수공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 곁을 지나가는 일본 행인의 발에 금방이라도 차일 것만 같았다.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를 폭발하는 나에게 총지사의 큰스님이 말했다.

‘분노는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옳지 않아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도록 교육해야 해요.’” 현재 불교명상종의 유럽 본산인 트로셀홀 수도원에서는 계를 받은 스님 32명이 수도하고 있다. 5년간 수련을 한 후에는 법을 가르칠 수 있고 견성을 인가받으면 ‘선사’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현재 영국 내 신도는 천 명이고, 리딩에 작은 수도원이 있으며, 30개 재가명상그룹이 있다. 입적할 때까지 지유 선사는 무려 100여 명의 서구인 제자에게 계를 주어 서구에 불교를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조용히 선정에 들었다가 다시 살아난 체험을 했는데 지유 선사는 이를 제3의 견성체험이라고 해석했고 그 과정을 언어와 그림을 통해 자세히 설명한 책을 발간하여 후학들이 자료로 쓸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