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33.모래바람만 가득한 누란왕국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33

2007-10-05     김규현

‘서역남로(西域南路)’의 성쇠(盛衰)

호탄에서 서역남로를 따라오면서 혜초는 다음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천년의 침묵에 들어갔다. 자, 그럼 우리도 아쉽지만, 『왕오천축국전』 마지막 구절을 읽어야만 하겠다.

“또 안서에서 동쪽으로 가면 옌지[焉耆]에 이른다. 여기에도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왕이 있는데 백성은 호족이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은데 소승이 행해진다. - 글자가 빠짐- 이것이 곧 안서(安西) 사진(四鎭)의 이름들이니 첫째가 안서, 둘째가 호탄, 셋째가 카슈가르, 넷째가 옌지이다. - 글자가 빠짐 - 중국 법을 따라서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바지를 입는다. - 이하 완전 결손 -”

그러니까 현 깐수성[甘肅省] 옌지에 해당되는 부분의 다음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혜초의 필사본은 백년 전, 뚠황의 천불동에서 발견될 때부터, 그 다음 부분이 없었다. 물론 3권짜리 목판본 『왕오천축국전』 원본이 기연(奇緣)에 의해 발견되면 모르지만, 그 때까지는 위 구절이 마지막 구절인 것이다.

이미 혜초가 옌지를 지나갔던 당시, 그 근처에 있었던 옛 누란왕국-선선(露善)국은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그것은 한 세기 먼저 지나갔던 현장 때에도 마찬가지였던지, 그도 귀로에 서역남로를 거쳐 누란왕국의 경내를 지나가면서 신기루 같은 이름만 남기고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간 한 전설적인 왕국을 생각하고는 간략히 기록하였다.
“대유사(大流沙)를 건너면, 성곽은 높이 솟아 있으나 인적이 이미 끊긴 찰마다나(沮末國) 옛터를 지나 다시 천리를 가면 나바파(納縛波) 즉 누란국(樓蘭國)의 옛 터에 이른다.” 그러나 그보다 두 세기 먼저 지나갔던 법현(法顯)의 『불국기』에는 선선왕국, 즉 누란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399년 뚠황을 떠난 법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사하(大沙河)를 17일간, 1천5백 리를 걸어 선선국에 도착하였다. 지형이 기묘하게 생겼으나 땅은 메마르다. 속인의 의복은 중원과 크게 다르지 않고 다만 모포는 조금 다르다. 국왕은 불법을 모시지만 4천여 승려들은 모두 소승을 공부하고 있다.
이곳에서 서쪽의 나라들은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천축의 법을 따르고 있다. 나라마다 호국말이 다르다. 출가 사문들은 모두 천축의 글과 말을 배우고 있다.”
이를 보면 5세기 초까지도 누란은 아직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낙양 가람기』를 보면 6세기 때도 아직 건재하였다. 그렇다면 누란의 쇠락은 7세기 초가 된다.
기원 전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독립적 왕국으로 번영하던 누란은 기원 전후를 전후하여 한나라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왔다. 당시의 상황은 『한서 서역전(漢書西域傳)』에 자세히 나타난다.
“선선국은 원래 누란이라 불렀다. 그 곳은 장안에서 6천 리 양관에서 1천6백 리 지점에 있다. 가구 수는 1,570호, 인구는 14,100명, 군인은 2,912명이다. 관리로는 선선도위(露善都尉)를 비롯하여 역장(驛長) 2명이 있다. 토지는 사막이어서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딴 나라의 경작지를 빌리고 있으며 곡식은 근방의 나라에서 수입하고 있다.”
1세기부터 5세기 중반까지 누란왕국의 판도는 동은 ‘놉노르’에서 서는 호탄국과의 경계인 니야(尼耶)에 이르는 동서 900km에 달할 정도로 당당한 독립왕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7세기 초, 생명줄인 수로의 변경으로 물이 고갈되어 주민 전원이 이주를 하지 않으면 비극적 상황을 맞게 된 것이었다.
서역남로의 시발점인 누란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바로 서역남로 자체가 그 기능을 다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실 누란의 쇠락과 같이 하여 서역남로는 그 역할을 서역북로에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방황하는 호수 ‘놉노르’의 신비
다시 돌아온 뤄창[若羌]에서 하루 밤을 지낼 곳을 찾아 시가지를 헤매다보니 상호들이 하나같이 누란, 미란 등과 같은 고대유적지 이름이 감초처럼 들어 있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해동의 나그네’도 누란초대소라는 곳에 짐을 내려놓고 늦은 저녁을 겸해 길거리 노천가게에서 ‘양로촬’이라는 양고기고치구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병채로 들이키며 이국적인 정취에 잠겨 들어갔다. 뭐, 애주가라서이기보다 중국은 맥주가 물보다 값싸고, 또 맥주컵이라고 내주는 것이 꼭 우리 소주잔 만한데다 깨끗해 보이지도 않아, 그래서 생긴 중국에서만 써먹는 ‘병나발’ 습관이었다.
빈속에 마신 맥주라, 오르는 취기에 비례하여 길거리에다 몸은 잠시 놓아두고 ‘유체이탈’의 술법으로 누란의 아득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오래 전에 읽은, 일생을 중앙아시아 탐험에 바친 위대한 도전가 스벤 헤딘(Sven Heding)을 따라, 옛 누란왕국 근처에서 지금도 방황을 계속하고 있다고 전하는 전설의 호수, ‘놉노르[蒲昌湖]’로 날아가 보았다.
누란왕국의 존재와 방황하는 호수 ‘놉노르’에 대한 풍문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냥 전설일 뿐이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처럼 1천5백 년이란 세월의 무게만큼 모래 아래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천불동의 고문서 발견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에 불어닥친 유적 발굴 열기에 편승하여 스타인(R.A Stein)과 스벤 헤딘 같은 탐험가들이 누란 유적지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스타인이 3차에 걸친 발굴로 이른바 ‘카로스티(Kharosi hi) 문서’라고 부르는, 목간(木簡)과 피혁에 쓰여진 고문서 800여 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어서 몇몇 학자들의 해독에 의해 마침내 『한서 서역전』과 『불국기』 그리고 『낙양가람기』에 기록된 누란왕국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누란왕국의 관내에 해당되는 미란, 차르크릭, 니야 등지에서 수많은 동서양에 걸친 유물들이 천여 년이란 긴 잠에서 깨어 모래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는데, 특히 미란의 폐사지(廢寺址) 벽화에서 발견된 날개 달린 천사상(天使像)과 꽃비단을 두른 군상들은 지중해의 그리스와 바로 연결되는 것이었고 그 외에도 그레꼬로만(Greco-Roman) 풍의 모직물과 한나라의 비단과 옥세공품 등을 보면 당시 얼마나 서역남로를 통한 동서양의 교류가 번성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한편 스타인과 달리 또 한 사람의 중앙아시아 매니아였던 스웨덴의 스벤 헤딘의 관점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방황하는 호수에 대한 원주민의 전설과 당시 몇몇 탐험가들의 가설을 뒤집고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놉노르의 위치에 대한 러시아의 폴제발스키와 코즈로프 그리고 독일의 리히트호펜과 영국의 스타인 사이에 벌어진 지리학적 비정(比定)에 관한 것이었는데, 결국 스벤 헤딘이 20년 만에 두 번째로 1934년, ‘쿰다리아[河]’를 따라 놉노르에 도착함으로써 그 논쟁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은 놉노르는 1천여 년을 주기로 동서로 수백km를 움직이는 호수라는 것이었다. 당시 스벤 헤딘이 69세의 나이였다고 하니 그의 사막에 대한 열정을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