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짓는 공덕이 왜 기쁜가

특집/수희공덕

2007-10-05     관리자

현대인은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 나의 이익 추구가 다른 이의 이익 추구와 늘 서로 충돌하게 되어 있고, 나의 기쁨이 다른 이의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화엄경』 「보현행원품」 수희분에서는 “남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하라.”고 한다.
남이 짓는 공덕을 왜 함께 따라 기뻐해야 하며, 왜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타인은 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이 성립하는 것일까? 바로 동일생명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즉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생명관에서 출발하므로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들을 볼 때 현상적으로는 개개의 생명체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혜의 눈으로 보면 실은 모두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위 전체가 하나에 들어 있고 하나가 바로 전체라는 사상(一切卽一·一卽一切), 비유컨대 풀 한 포기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하는 사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만든다. 이렇게 모두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자각할 때 비로소 나와 남이 동일생명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한 일이며, 어디 그것이 쉬운 일인가?’라는 반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한 가지 일화를 들어보자. 어느 마을에 빵 가게가 있었는데, 주인은 자기네 가게에 온 손님들이 자신이 만든 빵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문을 열고 청소를 하다보니 길 건너편에 새로운 빵 가게가 하나 생긴 것이 아닌가? 그 날 이후, 빵 가게 주인의 하루일과는 일변해버렸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좀더 빵을 맛있게 만들 것인가?’ 궁리하는 게 아니라, 건너편 가게에 손님이 얼마나 들어가나, 우리 집 손님이 가지는 않나를 쳐다보기 위해 종일 불안에 떠는 생활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귀한 손님(?)이 오셨다. 다름아닌 그 주인이 믿고 있던 종교의 신(神)이 오신 것이다. 신은 주인에게 “오늘 너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자 왔다. 얘기해 보거라! 단, 네가 말한 소원의 두 배(倍)를 건너편 빵 가게에 들어주어야 한다. 잘 생각해서 말하여라.” 그 말을 듣고 난 주인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하였다.
“신이시여, 저의 한 쪽 눈을 멀게 하소서!”
정말 웃지 못할 얘기이지 않는가? 빵 가게 주인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의 얘기이다. 얼마든지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너무 뻔한 답이다. 바로 항간에 떠도는 나의 행복은 남의 불행이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사고방식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범죄자가 우글거리고 불바다가 되거나, 홍수가 났다면 직접 그 일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과연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타인을 자기와 대립하는 존재로만 생각한다면 남이 착한 일을 하였더라도 내가 기뻐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남을 대립하는 존재로 보지 아니하고 적어도 뜻을 같이 하고 행을 같이 하며 원을 같이 하는 사이로 보는 것이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같은 생명의 나눔이라는 사실에 눈뜨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자타(自他)의 구별을 없애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참된 행복은 ‘나’와 ‘남’이 에고(ego)를 초월할 때 나타난다고 설한다. 다시 말해 ‘나’는 어디까지나 ‘나’이면서 ‘남’과 통하고 ‘남’은 ‘남’이면서 ‘나’와 같이 되는 경우, 즉 자타불이(自他不二)가 될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이 무르익었을 때는 행복을 모른다. 아니 모른다고 하기보다 행복 그 자체도 잊고 있다. 행복인 줄도 모르면서 행할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이 행해지게 되는 셈이다. 마치 글씨를 쓰는 사람이 글씨임을 잊어버리고 쓸 때야말로 가장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과도 같다 하겠다.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잃어버릴 때 가장 참된 자기 자신일 수 있고, 또한 자타의 구별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타불이의 세계를 생활 위에서 실현하기가 어려운 것은 자기애(自己愛)가 자아(自我)에게 얽매이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자아는 아무리 억제하여도 자아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애를 응시하여 자기라는 존재를 근원까지 추구하고 반성할 때만이 비로소 새로운 ‘나’와 ‘남’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체 중생과 우리들은 원래 한 몸이기 때문에 그 중에 누가 지은 공덕일지라도 바로 나 자신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남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할 때 남과 나는 둘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가까이 있다고 해서 이웃이 되는 게 아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이웃이 될 수 있듯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명관을 기축으로 삼을 때, 남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고 또한 생명의 본질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기쁨, 즉 받는 기쁨과 주는 기쁨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받는 기쁨은 조금씩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고, 또한 받은 것을 지키려고 하다 보면, 어느새 괴로움으로 변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는 기쁨은 그 자체가 욕심의 소멸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퍼낼수록 맑게 고여드는 샘물처럼 정신적인 넉넉함이 생긴다.
이처럼 후자의 기쁨은 전자에 비할 바가 아니며, 기쁨과 이익 그리고 즐거움을 무한히 나누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다만 나와 친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 즉 남까지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게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소아가 우주적인 대아로서 어떻게 승화되느냐 하는 인식의 전환만 있다면 간단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최소한의 희생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행복을 창조하는 힘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항간에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하지만, 우리는 남의 기쁨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일에 너무도 인색한 편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아낌없이 동정을 할 수 있으나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자책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잘못은 추상같이 다스리고 남의 잘못을 오뉴월의 훈풍 대하듯 할 수 있는가?’하고 물을 때,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나와 남에 대한 분별심, 차별심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