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평 할머니의 죽음

지혜의 향기/하심(下心)

2007-10-05     관리자

유난히 춥던 지난 겨울, 개평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비록 촌수로 치자면 8촌이 넘는 친척 할머니시지만, 내게 있어 친할머니나 다름없는 어른이셨다. 어머니는 더 했으리라! 내게 전화를 거시면서 울음을 애써 참고 계셨지만, 내가 만약 위로한답시고 몇 마디 했더라면 어머니는 끝내 목놓아 우셨을 것이다.
우리 집과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사셨던 개평 할머니는 어릴 적 동네 아이들에게 마귀할머니로 통했다. 거의 90도로 휜 허리와 썩어 문드러진 이빨도 모자라 애꾸눈이셨기 때문이다. 자기 눈에 심기 위해 연약한 아이들의 눈알을 노린다는 소문도 파다했기에 아이들은 개평 할머니를 더더욱 무서워했다. 특히 막내 남동생이 유독 심해서, 개평 할머니를 보기만 하면 울어대는 통에 나도 둘째도 여러 번 따라 울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개평 할머니는 마귀할머니가 아니라 자비로운 보살할머니셨다. 동네 궂은 일은 다 개평 할머니가 도맡아 하셨기 때문이다. 마을 잔치마다 그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와서는 음식 장만을 도와주셨다. 뭘 바라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을 일이니 내 일처럼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음식 솜씨도 뛰어나셨기 때문에 젊은 동네 색시들은 틈만 나면 개평 할머니를 찾아와 요리하는 법을 배워 가곤 했다. 특히 혼수음식은 무조건 개평 할머니 몫이었다.
우리 집 식기도 개평 할머니 손을 안 거친 게 없었다. 종가 집인 우리 집은 제사와 종중 행사가 참 많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김없이 담벼락으로 달려가 개평 할머니를 애타게 부르곤 했었다.
시집 오시고 얼마 안 있어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너무 일찍 종가 집 살림을 물려받으셨다. 20대 도시 처녀가 김치 하나 제대로 담가봤겠는가!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장독대 뒤에 숨어 울 수밖에. 그러나 이때마다 개평 할머니가 슈퍼맨처럼 나타나, 어머니를 위로하고 도와주셨다 한다.
변변한 밭뙈기 하나 없으셨던 개평 할머니는 남의 집 농삿일도 안 가리고 도와주셨다. 아침만 되면 개평 할머니 집에서 항상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개평 아짐, 집에 있소? 오늘 꼬추 좀 따야 쓰겄는디.”
그럼 어김없이 개평 할머니는 수건 하나를 둘러 메시고 따라 나서곤 하셨다. 그러나 이렇게 맘씨 좋고 일 잘하는 개평 할머니를 동네 머슴인 양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할머니가 몸이 좀 불편하셔서 못 가게 되면, 누군 도와줬는데 나는 도와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 때마다 할머니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 하시다가, 결국 아픈 몸을 이끌고 따라나서기가 다반사였다. 어머니는 남 좋은 일 그만 하시라고 푸념을 여러 번 늘어 놓으셨는데, 그 때마다 개평 할머니가 하시는 소리가 있었다.
“앗따! 고까짓 게 뭔 대단한 일이라고 별 소리 다 허네. 야가.”
개평 할머니 집에 도착해 보니, 동네 어르신들이 가득하셨다. 뒤뜰에서는 아저씨들이 상여를 만드느라 한창이었고, 앞마당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개평 할머니한테 배운 음식 솜씨로 장례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개평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꽃이 피었고, 육이오 사변 때 남편 분을 구하려다 왼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그 때서야 처음 듣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개평 할머니 성함조차 몰랐다. 그저 남원 근방의 개평리라는 동네에서 시집 와서 개평댁이라 불리다가 나이 좀 잡수시니까 사람들이 개평 할머니라 불렸다는 정도밖에 몰랐던 것이다. 새삼 개평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당신의 넓은 마음으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리라 믿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드디어 개평 할머니 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평 할머니만을 위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저 당연한 일이라며 당신의 일을 낮추셨던 개평 할머니에게 동네사람들이 마련한 당연한 일이 시작된 것이다.

노선종 님은 전북 임실 출생으로, 디자인회사 ‘MIND4 communications’ 기획팀에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