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불교의 은은한 향기

설화가 깃든 산사 기행/익산 함라산 숭림사

2007-10-05     관리자

가을 숭림사 부도 옆을 돌아 참나무, 소나무 어울린 길을 따라 함라산을 오른다. 붉게 타다 못해 까맣게 타버린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뒤로 떨구었던 질문이 문득 고개를 쳐든다. ‘이 산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함라산에서 천천히 걷다보면 황금들판 너머 군산 앞바다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긴 꼬리며 기울어진 소나무 위에서 겨울 양식을 찾기에 바쁜 청솔모의 잰 발소리를 만날 수 있다. 서울서 달려온 두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은 순간이다. 어디 그뿐이랴! 함라산엔 천년 고찰 숭림사(063-862-6394)가 있지 않던가.
그 깨끗함과 아늑함이라니! 절이 여느 집과 다르지 않다면 그 주인장의 부지런함을, 청정함을 듣지 않아도 알 만하다.
함라산(240m)은 야트막한 산이다. 금남정맥이 계룡산을 지나 부여의 백마강에 몸을 담근다고는 하지만 함라산 역시 엄연히 금남정맥의 또 다른 한 줄기이다. 다른 정맥들이 모두 그 끝을 바다에 두고 있기에 대둔산과 계룡산에 들기 직전 서해로 몸을 돌리는 이 산줄기야말로 정맥다운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함라산은 바로 이 산줄기를 따라 미륵사지를 일군 미륵산(430m)을 넘어와서는 금강과 서해를 바라보며 너른 들 위에 낮은 울타리처럼 솟아 있다. 그 울타리 안으로 만경강과 김제 만경평야의 호남벌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
우리 나라에서 벼농사가 가장 먼저 시작됐다는 이곳의 곡창지대는 일제 침략기 혹심한 쌀 수탈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당시 군산항으로 쌀을 실어내기 위해 놓여진 전주-군산 도로에는 그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차들이 씽씽 소리를 내며 오가고 있다.
그런데 또 이 들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농수산물 수출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더욱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들판의 쌀 대신 값싼 그네들의 쌀을 사다 먹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시장주의 ‘자유무역협정(FTA)’의 원칙이라고 윽박지르며. 이 농토에서 쌀이 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금값을 주고서라도 사다 먹어야 하는 것 또한 시장주의인데 말이다.
들판 너머 함라산 숭림사 부처님께 가는데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 쌀농사가 자꾸만 발목을 부여잡는다. 알아주는 이 없는 이 땅의 농심을 부처님은 알아주실런지.
숭림사는 통일 신라시대 경덕왕(742~764년) 대에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또 금마의 미륵사와 같은 때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나라의 원찰이었던 미륵사와는 달리 이 지역 사람들의 정신적 귀의처로서 창건되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숭림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에서 어렵지 않게 선종사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가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서 9년 면벽좌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숭산과 소림사의 이름을 따서 숭림사라 하였다는 것. 선종이 이름을 떨친 시기를 역사의 앞자리에서 찾아보면 통일 신라 말이나 고려 초 정도로 볼 수 있으니 숭림사의 모습 또한 그 어디쯤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익산구지』에는 “숭림암은 함열면 북쪽 7리 함라산 아래에 있으며 보광전(寶光殿)은 고려 충목왕 원년(1345년) 을유(乙酉)에 건축하였다.”고 하고 있다. 보광전의 암키와에도 지정 오년(至正 五年) 을유(乙酉) 4월에 행여 선사(行如禪師)가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고려시대에 이미 숭림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고려 이전과 달리 조선시대 가람의 모습은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숭림사의 모습은 조선 초까지 그 법등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후의 역사는 보광전 해체 공사 중 발견된 묵서(墨書)와 기와의 명문, 『정혜원상량기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554년(명종 9년) 들불로 인하여 사찰이 전소된 후 대대적인 공역(公役)으로 재건되었는데 서상실 7칸, 동상실 5칸, 서행랑 등 제법 큰 규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력(萬曆) 30’년이라는 흐릿한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는 임진왜란으로 또다시 재난을 당한 숭림사가 한동안 중건을 하지 못하다가 선조 35년(1602년) 이후에야 비로소 중건을 시작하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17세기의 중건과 중수로 당당한 가람을 일군 숭림사는 18세기에 이르면 안정기에 접어든 듯 자체적인 불사보다도 성불암 등 인근 암자의 불사가 활발해진다.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는데 보물 제825호로 지정된 보광전이 이 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또 우화루 안에 걸려 있는 『숭림사법당중수기』(1882년), 『숭림사공불계서(崇林寺供佛肋序)』(1748년), 『성불암중수기』(1888년) 등의 현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절의 역사를 말해주는 귀중한 기록들이 누각 안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해가 기울 무렵 숭림사로 들어가려니 들머리 길을 따라 서있는 한적한 나무들이 가을의 운치를 더해준다. 우화루 옆으로 들어서니 단아한 자태의 보광전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울려 섰는데 여지없이 감탄이 터져 나온다. 명부전격인 영원전(靈源殿), 나한전, 요사인 정혜원(定慧院) 등의 전각이 앞서 참배했던 화암사처럼 마당을 빙 둘러섰는데 아담하면서도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다.
보광전에는 나무조각으로 섬세하게 짜맞춘 닫집의 정교함이 놀라운데 부처님을 모시고자 했던 당시의 정성이 오롯하게 전해져 와 부처님께 올리는 절에 저절로 힘이 생긴다. 보광전 동편의 영원전은 1926년 성불암에 있던 칠성각을 숭림사로 이건하여 영원전이라 편액한 것이라고 한다. 그 안에 모셔진 지장보살상과 25권속 그리고 나한전에 모셔진 나한상은 같은 해에 이웃한 보천사(寶泉寺)에서 모시고와 봉안한 것이다.
지금까지 두 번이나 방광한 것으로 알려진 지장보살상은 세간에 영험한 부처님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일제 때 호시탐탐 이 부처님을 노리던 일인들이 갖은 패악을 저지른 끝에 지장보살상을 빼앗아 마침내 군산항까지는 실어내고야 말았다. 뛰어난 건축술을 간직하고 있던 보천사의 대웅전을 통째로 뜯어간 그들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배에 실어 일본땅으로 가져가려고만 하면 폭풍우가 몰아치고 배가 풍비박산이 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지장보살상의 영험함을 알게 된 일인들은 부처님을 감히 어쩌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숭림사에 봉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숭림사의 지장보살상은 더욱 영험한 부처님으로 참배되어진다고. 나한전을 참배하는데 맨 끝에 서있는 천진난만한 동자·동녀상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문다. 『숭림사재산대장』에는 ‘지장존상’ 및 나한상 등의 조성 시기를 숭정 7년(1634년)으로 밝히고 있으니 400여 년 전의 표정이 마치 살아 있는 듯 하여 더욱 신비하기만 하다.
“숭림사 도량을 깨끗이 해 찾아오는 이들에게 부처님을 더욱 가깝게 하는 것이 제가 부처님 밥 얻어먹는 데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익산 지역의 대표사찰로 익산 불교를 이끌어오고 있는 숭림사 지광 스님의 말씀이 일주문을 벗어나고도 오래도록 메아리친다. 유난히 정갈해 보였던 숭림사이기에 주지 스님의 그 말씀이 그 어떤 법문보다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숭림사 보광전 용마루의 청기와 하나는 스님께 여쭈어보지 못했다. 함라산에서 나아가다 만나는 취성산 상주사(上柱寺)의 청기와 두 개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상주사에 속해 있는 암자들이 취성산 안에 9개가 있었으며 머물던 스님만도 200여 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청기와는 그 옛날 찬란했던 역사의 일면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가을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함라산 숭림사를 찾아가 보자. 미륵사지와 취성산 상주사 또한 멀지 않으니 백제불교의 또 다른 향기에 흠뻑 취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