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32.서역남로의 요충지 호탄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32

2007-10-05     김규현

“안서를 떠나 남쪽으로 2천리를 가면….”

혜초 스님은 중국령 서역의 첫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서 중국 군대가 많이 집결한 곳이라고 기록한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附) 쿠차국(庫車, Kucha)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다음 행선지는 당연히 서역북로(西域北路)로 가서 언기(焉耆)를 거쳐 돈황으로 가야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런데 『왕오천축국전』에는 쿠챠 다음에 문득 호탄이라는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호탄이라면 서역남로상에 있는 곳이므로 혜초의 진행 방향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이다. 그러므로 혜초가 호탄에 들렸다는 기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본문을 읽고 그 다음에 이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안서를 떠나 남쪽으로 호탄국(和沙國)까지 2천리를 가면 역시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절도 많고 (중략) 여기서부터 동쪽은 모두 당나라의 땅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개원(開元) 15년(727)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는데….”

위 구절을 보면 혜초는 분명 ‘개원 15년 11월’에 종착지에 가까운 쿠차에 도착했는데, 왜 여기서 돈황으로 바로 나가지 않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호탄이라는 곳으로 뒤돌아 갔을까? 혹 본문에서 보이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면 혜초는 호탄에는 직접 가지 않고 단지 들은 사실만 기록한, 그러니까 호탄은 그저 전문국(傳聞國)에 속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단지 한 가지, 그 길을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해동의 나그네’는 그 2천리 길을 따라 가보기로 하였는데, 여러 가지 지도를 놓고 다각도로 추정해본 결과 그 루트는 바로 쿠차 옆의 쿠아레[庫爾勒]라는 곳에서 서역남로상의 뤄창[若羌]으로 바로 횡단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니까 들어오면 나갈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 가운데를 북에서 남으로 횡단하는 루트였다. 아무 준비도 없이 혼자 몸으로 가기에는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 길을 꼭 돌파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혜초의 의문을 풀기 위한 것도 있지만 또한 5세기 초의 구법승인 동진(東晋)의 법현(法顯)도 지나갔던 유서 깊은 길이었고 더구나 뤄창 근처에 전설적인 고대도시 루란(樓蘭)의 유적이 있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모험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틀에 딱 한 번만 있다는 승객도 몇 명밖에 없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고 “옴 마니 반메 훔”을 염하며 막막한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역시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길이야 뭐, 직선상으로 나 있으니까 문제가 없었지만 군데군데 모래에 묻혀 툭하면 길이 끊겼고 차도 툭하면 고장 나서 땡볕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였다. 거기다 바람 또한 세차게 불어 눈을 뜰 수가 없어 차 밖으로는 나갈 수조차 없었기에 고스란히 찜통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모래뿐이고 들리는 것은 귀신소리 같은 바람의 울부짖음뿐이었다. 법현은 이 곳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막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들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직 죽은 사람의 유골만이 갈 길을 가리키는 지표가 되어 준다.”

또한 현장도, “온통 모래뿐인데 바람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발자국이 남지 않아 길을 잃는 수가 많다. 그래서 그 곳을 왕래함에 있어서는 유해(遺骸)를 목표물로 삼는다.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사람 짐승 할 것 없이 눈을 뜨지 못하며 때로는 노랫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울부짖는 소리도 듣게 되는데 그것을 듣는 사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가끔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모두가 악귀의 소행이다.”

서역 옥(玉)의 원산지, 호탄

별로 통행량이 없는 도로인지라 하룻밤을 새운 승객 10여 명은 결국 고장 난 차와 기사를 사막에 남겨두고 다음 차편으로 그 바람지옥을 탈출하여 구사일생으로 뤄창(若羌)에 도착해서 하루를 쉬고 남로를 타고 뒤로, 즉 서쪽의 호탄으로 향하였다.

호탄은 일명 우전(于田), 화전(和沙) 또는 쿠사타나 등으로 알려진, 한나라 때부터의 서역남로의 최대의 오아시스로서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중개무역의 중심지였다.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거대한 곤륜산맥이 티베트와 경계를 지으며 뻗어내려 만년설의 녹은 물을 풍부하게 공급해주고, 북쪽으로는 대사막을 안고 있어서 기후가 온화하기에 예부터 과일, 곡물, 비단, 카페트가 많이 생산되어 실크로드 도시 중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 곳의 흑옥(黑玉)과 취옥(翠玉)은 멀리 로마에까지 이름을 날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현장의 눈에도 이 곳의 넉넉함이 눈에 띄었는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쿠사타나국[호탄]은 주위가 4천리이다. 모래와 돌이 태반이지만 흙이 있는 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있어서 온갖 과일이 산출된다. 모직물과 옥이 많이 난다. 기후는 온화하지만 회오리바람이 일어 흙먼지를 날린다. 사람들은 예의범절이 있고 성격은 온순하고 학문을 좋아하면서 기예가 발달했다. 대개 부유한 편이며 음악을 존중하고 가무를 즐긴다.”

자, 다시 혜초의 노정을 정리해보자. 전통적인 ‘실크로드’는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돈황을 나서서 양관(陽關)을 빠져나와 바로 서쪽으로 석성(石城-若羌), 차말(且末), 니야(尼耶), 책륵(策勒) 그리고 호탄을 거처 엽성(葉城)을 지나 총령이나 카슈가르로 나가는 길을 ‘서역남로’라 하는데 주로 한(漢)대에 많이 이용되었던 것에 반해 돈황에서 옥문관(玉門關)을 나가 루란을 경유해서 쿠아라, 쿠쳐 그리고 카슈가르로 나가는 ‘북로1길’이나 옥문관에서 하미, 투루판, 언기, 쿠아라, 쿠쳐로 나가는 ‘북로2길’은 주로 당나라 때 많이 이용되었던 길이었다.

그러니까 초기 구법승인 법현, 혜생 등은 호탄을 거치는 남로를 이용하였고 나머지 구법승들은 북로를 주로 이용하였다. 다만 현장만은 갈 때는 북로를, 올 때는 남로를 택했다. 그러나 혜초의 경우 누구보다 색다른 경우에 속하는데, 바로 이유는 남, 북로를 동시에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북로를 이용해서 거의 서역을 통과한 지점에서 되돌아가서 남로를 다시 택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경우인 것이다. 호탄은 대사막 안에 가장 깊숙하게 자리잡은 탓으로 비교적 중국화가 덜 진행되어서 그런 대로 신강 특유의 고유한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비록 카슈가르만은 못하지만 일요시장도 규모가 크고 인상 또한 이국적이었다. 물론 호탄의 이런 바자르도 볼 만하였지만, 역시 호탄 최대의 관심거리는 역시 기원 전후에 번성했던 오아시스 도시였던 고대 정절국(精絶國)의 유적지인 니야(尼耶)였다. 20세기 초 영국의 스타인(Steien) 탐험대에 의해 3차에 걸쳐 발굴된 니야 유적지에는 수많은 고대 실크로드의 유물들이 모래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카로슈티(Kharosthi)’ 문자로 목간(木簡)에 쓰인 문서였는데, 그 숫자가 8백여 개에 달해 학자들에 의해 거의 해독이 되었다고 한다.

2천여 년의 모래바람 소리를 머금고 있는 폐허 위에 오늘도 석양은 지고 있었다.
“옴 마니 반메 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