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31.안서도호부였던 쿠처와 투루판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31

2007-10-05     김규현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龜玆國)에…”

‘해동의 나그네’가 전에 서역을 헤매다 비상사태를 만나 한번은 호사스럽게도 비행기를 타고 사막 위를 날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눈 아래 펼쳐지는 사막이 마치 황갈색의 거대한 융단 같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창 밖으로는 가끔 오아시스가 스쳐갔는데 그것은 마치 큰 비취(翡翠)보석을 무늬삼아 상감(象嵌)해 넣은 것처럼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저 멀리 한편으로는 천산(天山) 산맥의 설봉이 하늘에 닿을 듯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기슭에서 만년설이 흘러내린 시냇물이 거미줄처럼 사막 쪽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 비로소 사막에 왜 오아시스가 생기는지에 대한 오랜 궁금증을 풀 수가 있었다.

대 사막에 점점이 박혀 있는 이런 오아시스를 하나의 띠처럼 잇는 비단길은 대체로 최소한 5일에서 한 달간의 일정으로 장안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낙타의 빠른 걸음걸이로 계산한 것이었던지 우리의 혜초 스님은 천신만고 끝에 중국령 카슈가르에 도착하여 두 번째 오아시스 도시인 쿠처에 한 달 걸려 도착하였다. 그러니까 혜초는 아마도 낙타도 못 타고 걸어서 왔을 것이리라.
“카슈가르로부터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龜玆國)에 이른다. 이 곳은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附)로서 중국 군대가 집결하는 곳이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은데 소승이 행해진다. 고기와 파 부추를 먹는다. 중국인 승려는 대승을 행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혜초의 기록에서 안서도호부가 있었던 곳이 현 쿠처인가 아니면 다른 곳인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기록에 의하면 쿠처에도 도호부가 나오지만, 그 다음에도 “개원(開元) 15년 상순에 안서(安西)에 이르렀는데…”라는 구절이 나오고, 또한 그 다음으로 『왕오천축국전』의 끝 구절인 엔지(焉耆)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 개의 도호부가 있는 셈이니 그의 기록은 일관성이 없는 셈이다. 더구나 쿠처와 안서(安西), 엔지는 모두 ‘서역북로’ 상에 있는 도시인데, 그 중간에 ‘서역남로’에 있는 호탄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이 부분적인 기록이라 하더라도 위의 구절은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혜초의 기록에서의 ‘안서(安西)’가 어디인지에 대한 비정은 방계적인 자료에서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런 자료는 충분하여 이를 참조해서 먼저 결론부터 내린다면, 쿠처 부분에서 누락한 추가 기록이거나 아니면 그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은 다른 도시인 고창, 즉 현재 투루판의 까오챵 성(高昌城)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곳들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기에 일찍이 기원전부터 한(漢)나라의 서역 경영에 의해 중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지만 중원에서 멀고 먼, 또한 사막 속에 고립된 지역이라는 특성상 대체로 독립왕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唐)이 건국되면서, 640년 이후에는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한 동안 완전히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현장은 그 직전에 이 곳을 지나가며 이렇게 적고 있다.

“쿠처 왕국은 동서 1천여 리, 남북이 6백여 리이다. 나라의 도성은 주위가 17리 된다. (중략) 관현악은 특히 여러 나라 가운데 이름이 높다. 국왕은 쿠처인이나 지략은 빈약하여 강력한 가신들한테 눌려 지낸다.”

또한 쿠처는 현장의 지적대로 서역의 대표적인 예향(藝鄕)으로서 음악과 무용의 중심지로 이름을 날렸지만, 또한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년)의 고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장에 앞서 불경의 초기 한역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 불세출의 역경승은 전진(前秦)의 여광(呂光) 장군에 의해 장안으로 강제로 초빙되어 74부 380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일설에는 오직 그를 얻기 위하여 먼 쿠처까지 군대를 파견하였다고까지 할 정도로 당시 구마라집의 가치는 높았다고 한다.

현재 쿠처 시내에는 옛 안서도호부의 성터가 남아 있긴 하지만 거의 형태조차 희미하여 옛 영광을 연상하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근교에 키질 천불동이 그런 대로 보존되어 있어 역사의 이끼 냄새를 맡고자 찾는 길손들에게 그나마 섭섭함을 면하게 하고 있었다.

“개원(開元) 15년 11월 상순에 안서(安西)에 이르렀는데…”

만약, 혜초가 쿠처에서도 도호부의 중국 병사를 보았고 여행을 계속하여 안서에 도착하여 다시 절도사를 만났다면 후자는, 비록 그의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명 현 투루판(吐魯番)의 고창성에 주둔하였던 당나라 병사를 만났으리라. 그러니까 혜초는 당나라 병사가 있는 안서사진(安西四鎭)을 모두 도호부라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하고 비정할 뿐이다.

당시 이 지방의 실정은 현장(玄奬) 법사의 행장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고창국이 당나라에 병합되기 10년 전인 서기 630년, 고창국의 국왕의 요청에 의하여 한 달 이상을 ‘반야경’을 강의하고 만류를 무릅쓰고 천축으로 떠나며 귀국길에 다시 들러 3년간 머물며 설법을 하겠다는 굳은 언약을 하였다.

이에 국왕은 법사가 천축에 이르도록 도와주라는, 실크로드의 각 부족장에게 보내는 추천장과 더불어 여행길에 필요한 온갖 물품을 시주를 하면서 법사를 전송하였다. 그러나 17년 후 현장이 귀국할 때에는 이미 이 독실한 불교왕국은 멸망해버렸기에 고창국 왕과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서역의 영광은 그 후 엉뚱하게도 우리 해동의 후예에 의해 이루어졌다. 747년,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가 안서도호부의 부절도사가 되어 부임하였는데, 당시 고선지의 휘하에는 고구려 유민으로 조직된 용맹한 ‘단결병(團結兵)’이 있어서 이들을 주축으로 한 서역정벌군은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당시 토번(吐蕃)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현 파키스탄 길깃트인, 소발율국(小勃律國) 일대를 함락시키고 실크로드의 요충지를 모두 수복하고 개선하였다.
그 전공으로 고선지는 일약 서역 총사령관인 절도사로 승진하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은 서역을 무대로 큰 전공을 세우게 되었지만, 결국은 타라스 강 전투에서 패하여 그 영광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결과는 망국의 유민들의 한만 더욱 깊어졌지만, 하여간 해동의 선조들의 기개는 온 서역을 진동시킨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보다 20여 년 전 우리의 혜초 스님이 이 곳을 지나갔다.

“개원(開元) 15년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는데 그 때의 절도대사(節度大使)는 조군(趙君 安西副都護 趙貞)이었다. 또 안서에는 중국인 승려가 주지로 있는 절이 두 곳이 있고 대승이 행해져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바로 ‘개원(開元) 15년’이라는 당 현종(玄宗)의 연호(年號)가 나타난다. 바로 서기 727년도이다. 『왕오천축국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의미 있는 단어이다. 이 단순한 숫자로 우리는 혜초의 모든 것을 추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단어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을 세운다는 자체가 두려울 정도로 ‘개원 15년’은 정말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투루판 부근에는 쿠처에 비해 볼 만한 유적지가 많다. 그렇기에 ‘해동의 나그네’는 이곳의 특산품인 포도를 한 봉지 들고 다니며 종일토록 유서 깊은 고창고성을 비롯해 교하고성(交河古城), 베즈커리크 천불동, 아스타나 고분군 등을 돌아보고 다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전설이 서려 있는 화염산(火焰山)도 바라보았다. 역시 해질녘이어서인지 그 산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나그네의 귀소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