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중생이 성불한다

불광법단

2007-10-05     관리자

형제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은 시간에 매이신 분이 아니십니다. 시간이 시작하기 이전에 그리고 몇 만 겁이 지나가도 다시 영원히 시간이 끊어진다 해도 영원하신 그대로의 부처님이십니다. 일체 세간이 다 변하고 허물어져도 천지가 몇 만 번 바뀌어도 부처님은 변화 없으신 불멸의 몸이십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법의 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마 부처님에 대한 이와 같은 믿음은 우리 불광 형제들이 누구보다도 이 점에 있어서는 확고하리라 믿습니다. 부처님은 영원히 항상 머무는 부처님이십니다. 우리 부처님은 결코 허물어지는 몸이 아니십니다. 금강신이며 불괴신이며 법신이십니다. 부처님께서도 스스로 “법신으로 알라” 하고 누누이 분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 태양이 영원히 빛나고 찬란한 햇살 온 누리에 부어지듯 영원하신 부처님! 그 부처님이 그림자 지고, 바람 불고, 춥고, 덥고, 밤낮이 있고 하는 변화무쌍한 범부 세계 속에 고통 많고 변화 많은 불행한 범부들, 그 범부들 세계에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대들 안개 가운데 지금 헤매고 있다. 꿈을 깨라. 네가 보고 있고 네가 소리치고 있고 네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그 세간 모두는 꿈이니라. 꿈을 깨라.”
꿈에서 깨어서 불멸의 진리의 태양을 안겨주시고자 부처님은 이 땅 우리 곁에 오시어서 우리와 함께 고뇌하시고 아파하시고 슬퍼하시고 세간 일을 다 맛보신 것입니다. 함께 괴로워하시면서 거기서 탈출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출가인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시고, 이 땅에서 머무시며, 이 땅에서 발심하시고, 수행하시고, 성도하시고, 설법하시고, 열반에 드신 그 모두는 지극하신 자비의 표현이십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스스로도 말씀하시듯이 형상의 부처님 그 그림자 거두시어서 형상의 그림자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들이 부처님의 법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부처님이 나신 것, 부처님이 성도하신 것, 부처님이 설법하신 것, 열반에 드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은 카필라에서 나시고, 마갈타에서 성도하시고, 바라나시에서 설법하시며,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셨나니 대자비의 햇살이, 대자비의 위신력이, 크신 은혜가 이와 같이 우리 곁에 와서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불멸의 몸이시어라
부처님은 실로 불멸의 몸이십니다.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부처님의 열반으로 보이신 궁극의 법문을 돌이켜 보면서 먼저 그 대문을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래는 실로 성불한 지가 무량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겁입니다. 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최대의 표현일 것입니다. 성불하시기 전에 완전히 이미 이루신 법이었습니다.
겁이라는 것은 긴 시간입니다.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긴 시간입니다. 겨자 겁이니 풀섭 겁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마는 겨자 겁, 풀섭 겁 가지고도 비유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겨자 겁이라고 하는 것은 동서 사방 40리가 되는 큰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담아놓았는데 백 년에 한 개씩 새가 와서 물어갑니다. 그것이 다하는 겁입니다. 풀섶 겁은 겨자 겁보다 더 한 것이라고 합니다. 돌덩어리를 백 년에 한 번씩 천인이 내려와서 부드러운 천으로 된 하늘 사람 옷으로 스치고 지나가서 돌이 마모가 되어서 다 없어지는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성불 즉, 부처님이 본래부터 법이었다고 하는 대문을 이렇게 경에는 긴 시간으로 설명합니다마는 사실은 시간 이전입니다. 시간 개념이 생기기 이전, 시간 개념이 생기기 겁 전 겁 후에 결정적인 중심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 옛날부터 항상 사바세계에서 설법교화하여 또한 백천나유타 겁 아승지 겁 동안 중생들을 한없이 교화하셨습니다. 그 긴 시간 가운데에 연등불 부처님께서 나오십니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스승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연등부처님 모시고 배워서 마침내 “그대 어느 시대에 가서 성불하리니 호를 석가모니불이라 하리라” 하고 인가하신 분이 연등불이십니다. 그런데 연등불조차도 사실인즉슨 부처님의 크나큰 교화 방편 그 가운데 들어 있는 한 방편 시현이십니다. 부처님이 부처님이시기에 두 부처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법이신 부처님이 있을 뿐입니다. 영겁의 시간을 넘어선 영원한 부처님! 완전무결한 부처님! 그 부처님이 있을 뿐입니다. 그 부처님이 지극한 자비를 내시어서 중생제도하시고자 온갖 방편 베푸시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충만하시며 무한국토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부처님은 오직 법일 뿐이며 법신이신 부처님입니다.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신이십니다. 오직 하나의 부처님이며 궁극의 부처님입니다.
이 부처님 저 부처님 다 있으니, 이 부처님 저 부처님이 다른 부처님이 아닙니다. 대자비 시현으로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방편으로서 그와 같이 원을 세우시고, 그와 같이 국토를 이루시고, 그와 같이 중생을 제도하시는 법을 여시는 그런 차가 있을 따름이지 근원은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뜨거운 자비로서, 지극하신 성은의 표시로서 이 땅에 오시어서 그 모습을 거두시려고 하실 때 내리신 법문이 여러 경전들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열반경에는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만인이 그대로 불성생명
대반열반경에 참으로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핵심적인 것 몇 가지를 말하고자 하면 첫째로 여래상, 부처님은 상주하십니다. 항상 머무십니다. 여래가 팔십 세에 세간을 떠나서 죽는 것같이 보이지마는 여래는 실로 무량장수이십니다. 금강신이십니다. 영원한 몸이십니다.
“너희들이 보지 못해서 그렇지 실로는 항상하는 몸이며 불멸의 몸이다.” 하시며 열반에 드시면서부터 간곡히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법성변(法性遍), 불성변(佛性遍)이라고 하지요. “불성이 보변(普遍)해서, 불성이 두루해서 널리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완전하다. 만인이 그대로 불성이다.”
각자가 불성이라는 것을 모르고 각자가 번뇌에서 시달리고 그럽니다마는 만인이 불성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선한 생각이 조금도 없는, 선근이 조금도 없는, 정말 악의 종자라고 알려졌던 찬티카(일천제 또는 천제)도 성불한다고 했습니다. 선근이라고는, 착한 뜻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악의 뭉치라고 이르는 악당도 성불한다고 부처님은 설하십니다. 만인의 성불을…. 영겁의 생명으로서 영원히 머무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만인은 불성으로서 누구나 성불한다.” 하고 확인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열반 경계에 대한 말씀이십니다. 열반은 무슨 뜻인가? 니르바나를 한문으로 적어서 열반이라고 합니다. 번뇌가 다한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범부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번뇌의 불길이 활활 타오릅니다.
눈으로 봤을 때는 눈에서, 귀로 들었을 때는 귀로 듣는 소리에서, 생각으로 헤아렸을 때 생각에서 온갖 불길이 활활 타오릅니다. 번뇌의 불길이 다 타버리고, 나무가 다 타고, 기름이 다 타고, 재도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 번뇌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간 불행과 고통과 윤회 등 일체가 바로 번뇌에서 오는 것이고, 생사가 바로 번뇌인데 번뇌가 다함으로써 그 중생고는 다 끝입니다. 생로병사가 끝이며 윤회가 끝입니다. 중생세계가 끝입니다. 막힘이 있는, 한계가 있는, 장애가 있는 세계의 끝입니다. 가장 원만한, 가장 완전한 진리 자체에 복귀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고 장애가 있고 고통이 있고 변멸이 있는 것은 중생세계입니다. 그 모두를 떠난 진리의 세계를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얽히고 속박 받는 데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며 즉 해탈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영원할 뿐입니다. 시간이 끊어진 영원입니다. 그리고 이 세간이 고통이냐 하면 고통이 아닙니다. 일체 번뇌가 끊어졌기 때문에 순수한 진리, 완전한 진리, 그리고 법 그것뿐이기 때문에 끝없는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번뇌는 본래 없다
이 세간에서는 이 몸뚱이를 자유로 삼아왔기 때문에, 몸뚱이는 몇 가지 요소가 결합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 조건 몇 가지가 공급이 잘 되고 환경 조건이 맞으면 살아가고 그것이 맞지 않으면 병이 나고, 공급이 중단되어 버리면 죽는다고 합니다. 육체가 받는 부분이 깨어져버리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뚱이가 있다고 하지만 실로는 없는 것입니다. 변해가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그 열반의 경계는 부정이 아니라 청정입니다. 끝없는 영원과 끝없는 즐거움과 불성의 완전과 궁극의 청정, 이것이 열반 경계입니다.
만인의 원래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몸은 유일한 의지처이며 이 세간이 유일한 것인 줄 알고 매달립니다. 그것이 변해가고 깨어지고 죽을지 모르고 이 몸, 이 세간이 영원한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범부들이 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서 모두를 바치고 가치의 중심을 삼아서 개인적으로도 그 가치를 추구하고 세간적으로도 그 세간을 추구하고 서로 반목하고 싸워가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다툽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이런 중생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매달리고 있는 그 모두는 실이 아니라 허망하니라. 너희들이 있는 모든 물질적 요건은 끊임없이 변해가느니라. 모두는 흘러간다.”
범부 세간이 보고 있는 것을 그렇게 평가하시고 그렇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진실한 깨달음의 경계, 본연이 다한 진실한 모습의 세계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청정이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들은 잘 살펴야 합니다.
이제까지 “이 세간은 무상한 것이다. 덧없는 것이다.” 하고 가르쳤습니다. 무상의 법문은 중생들이 보고 있는 중생의 견해를 떼버리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시지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는 아닙니다. 깨달음 자체는 상(常)입니다. 불멸(不滅)입니다. 시간과 관계없는 영원한, 완전한 상입니다.
번뇌가 있을 때 변멸의 세계지만 번뇌가 없는 자리에는 완전무결한 영원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중생세계에는 번뇌가 있고 부처님에게는 번뇌가 없고 그러니까 중생에게는 본래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거듭 말하지마는 번뇌는 없는 것입니다. 중생은 미혹입니다. 꿈을 꿀 때 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면 그만입니다.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미(迷)입니다. 미혹해서 중생이 번뇌가 있다고 하고, 미혹해서 중생이 되었다고 그럽니다. 미혹하지 않으면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미혹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 잘못 알고 있는 것, 잘못된 생각을 돌리면 미혹이 끝입니다. 이 점을 명쾌하게 말한 것이 반야입니다. 반야는 한마디로 무입니다. 완전히 허망한 것, 무라는 것을 분명히 규정해 놓고 실로 있는 것은 진실 이것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이 열반에 즈음해서 남기신 열반경의 법문에서는 “부처님이 영원하시다. 항상 머무신다. 일체 중생이 불성이다. 누구나 성불한다. 번뇌가 끊긴 진실한 경계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상(常)은 무상(無常)이 아니라 무상의 반대인 영원하다는 것이며, 낙(樂)은 고(苦)의 반대이며, 아(我)는 무아(無我)의 반대이며, 정(淨)은 부정(不淨)의 반대입니다.
사실 우리 불광 반야바라밀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번뇌의 허물을 다 꿰뚫어 버렸을 때 나타나는 것은 바라밀뿐이며, 불성뿐이며 여래세계뿐이며 거기 있는 것은 상락아정입니다. 무한의 공덕이 한없이 있는, 모두가 하나의 불성에서 대립없이 하나로 있는 큰 진리의 생명이다라고 하는 것이 반야바라밀 공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부분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고, 그 밖에도 계율을 존중하라든가, 방일하지 말라든가 하는 간곡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영원한 몸이신데 왜 열반에 들었다고 보이느냐. 그 비유는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의사의 비유가 있습니다. 의사가 어디 갔다 왔을 때 아들들이 약을 잘못 먹고 병이 났습니다. 그 병은 정신이 돌아버리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들한테 아버지는 약을 만들어 줍니다. 어떤 아들은 먹고 금방 나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들은 안 먹습니다.
약의 빛깔이 왜 이러냐. 맛이 이러냐 해가면서 안 먹습니다. 궁리를 하다가 마지 못해서 방법을 씁니다. 그 아버지는 먼길을 떠납니다. “내 나이도 많고 갈 데가 있으니 멀리 좀 갔다오겠다.” 하고 외국에 갑니다.
외국에 가서 “당신 아버지 돌아가셨소.” 하고 전갈을 보냅니다. 아들들이 그 때서야 “내가 생각나거든 이 약을 먹어라.” 하고 가셨던 그 아버지의 유언 같은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약을 먹습니다. 그 약을 먹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셨다던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열반에 들었다고 하고 아들들을 속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에게 약을 먹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나가서 죽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을 보이심도 그 모두가 이와 같이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이며 지극하신 자비를 여기서 다시 느껴야 하겠습니다.

일체 중생이 성불한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외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죄를 짓고 고통이 있고 얽매이고 온갖 재난 가운데 헤매이고 기약이 없는 불행한 존재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항상 함께 하고 부처님의 인도를 항상 받으며 부처님의 가호력을 입는 나입니다. 영원하신 부처님! 이것만으로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일체 중생이 성불한다. 만인이 성불한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낙인 찍힌 자라 하더라도 너의 본성은 불성이며 너의 본성은 금강석이니 일찍이 때묻거나 허물어지거나 물들거나 변한 적이 없다.”고 부처님은 증명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 더 큰 명예로운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너는 성불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약속입니다.
세 번째는 “이 땅은 버려야 할 땅인가, 더러운 땅인가, 서로 대립하고 싸우다가 어느 한 쪽이 이기고, 어느 한 쪽이 못 살고 마침내 죽고, 그것을 되풀이하는 세상인가. 불행, 죽음 그것이 반복하는 세상 그런 세상인가.”했을 때 부처님은 “아니다.” 하고 나옵니다.
우리의 본래 세계는 상, 낙, 아, 정, 만인이 영원과 청정과 즐거움과 자재가 갖춰진 존재인 것입니다. 축복을 내린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착한 마음 내어서 잘 되면 구제해 주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를 받기 전에 너희들은 본래 그런 자라는 것입니다. 본래가 금덩어리입니다. 본래가 금강석입니다. 그 동안 아무리 더러운 곳에 드나들었고 시궁창에 드나들었다 하더라도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 너는 성불한 사람이야.” 부처님이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버린 놈이다. 이미 먹칠한 인생이다.” 하고 대해버렸을 때 그 사람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합니다. 지금 부처님 말씀같이 “너는 쓰러질 수 없는 사람이다. 너는 금강석이다. 너는 성불한다. 불성이다.” 이것을 봤을 때 그 사람이 천 번 만 번 악당짓을 했다 하더라도 천만 번 다음부터 새롭게 빛나는 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불멸의 힘을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을 긍정하기 때문에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을 구하는, 이 땅의 중생을 구하는, 이 세계를 구하는 최대의 가르침은 이것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45년간 법을 설하시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남기신 법문은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