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불교] 텐진 팔모(Tenzin Palmo)

서양의 불교

2007-10-05     관리자

영국인 비구니 텐진 팔모 스님은 밀라레빠의 뒤를 이어 1976년부터 12년간 히말라야의 작은 석굴에서 홀로 기거하며 명상수행을 한 사람이다. 문명의 이기가 극도로 발달해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하고 무언가 버튼을 눌러 그를 시정해야만 하는 현대인이라 할 수 있는 영국 여성이 오랫동안의 고독과 추위 무서움을 이기고 12년간이나 홀로 석굴생활을 했다는 것은 가히 이례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43년 영국에서 태어난 팔모는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카르멜회의 수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언제나 예쁜 옷을 입고 다니며 남자친구도 많았던 인기 있는 소녀였지만 내면으로는 수행자의 삶을 원했던 그는 이미 18세에 불교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상좌부 불교를 믿었다. 그 시절 영국에서의 티벳불교는 검은 마술과 성적 행위를 하는 타락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티벳불교 소개 책자를 보다가 티벳의 4개 종파 이름이 나오자 그는 담박, ‘나는 카규파야’라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놀란 팔모는 카규파를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영어판으로 나와 있던 밀라레빠의 전기를 읽었는데 그 때 자신이 카규파라는 확신이 들었으며 이제는 스승을 찾아 인도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1963년 20세의 나이에 인도로 불교 공부를 하러 갔던 그는 이듬해 티벳불교 8대 활불인 캄트룰(Khamtrul) 린포체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사미니계를 받았다. 서구여성으로서는 비교적 일찍 계를 받은 셈이다.

6년간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한 후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라훌에 소재한 작은 승원으로 가서 좀더 강도 높은 수행을 6년간 하였다. 이후 인근 산 속의 석굴에 홀로 들어가 12년간 명상을 했다.

히말라야 석굴에서 홀로 수행하던 시절 그의 일정을 한번 보자. 주로 눈이 많이 내리는 11월에서 5~6월까지는 명상정진을 한다. 오뉴월에 눈이 녹으면 채소도 가꾸고 필요한 물품도 들여 놓고 땔나무도 모으고 석굴의 보온을 위해 벽에 진흙도 바르고 한다. 때로 사람들이 찾아올 때도 있다. 이 기간에 팔모는 독서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10월에는 스승을 뵈러 아랫마을 타시종으로 내려갔다. 물론 이 기간에도 아침 저녁 수행을 거르지 않았다. 석굴에서 홀로 정진하던 12년 동안 가장 힘든 게 있었다면 지루함이었다. 정진을 시작한 지 한 2주가 지나면 이걸 앞으로 몇 달 동안이나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온다. 마치 똑같은 영화를 하루에 네 번씩 보는 것과 같은데 그런 일을 내일도 모레도 내주도 그 다음 주도 내달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런 문제 역시 주변에 상의할 사람이 없으므로 혼자서 해결해야만 한다. 이 경우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인정하고 난 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럴 때면 그저 일정을 지켜나가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일정의 리듬을 깨지 않는 것이 중요했고 또 자신에게 그것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고 그냥 하는 게 중요했다. 그러다 보면 수행 자체에 탄력과 활력이 붙어 저절로 된다.

석굴에서 수행하던 어느 해 겨울 눈보라가 7일 동안 계속된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라훌 지역의 많은 마을이 눈사태를 만나 파괴되었다. 수십 톤의 눈에 덮여 팔모는 굴 속에 갇혔다. 난로에 연결한 굴뚝도 부서져 불도 피울 수 없었다. 석굴 안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문을 열면 바로 빙벽이었다. 손바닥만한 공간에 갇혀 있음을 느낀 그는 공기가 점점 더 희박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폐소공포증도 당황함도 없이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 때 자신이 오직 하나 귀의할 곳, 즉 스승을 생각한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스승께 기도를 올렸다.

자신을 중음에서 보호하고 인도해 주십사 기도하던 중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굴을 뚫고 밖으로 나가라!”

그는 문앞에서부터 얼음을 깨나가기 시작했다. 깨어낸 얼음과 눈은 굴 안으로 들여 왔다. 삽을 쓰다가 얼마 후에는 냄비와 뚜껑, 그리고 손가락을 사용했다. 석굴 안에도 곧 눈이 가득 차 얼마 후에는 앞에도 까만 어둠, 뒤에도 까만 어둠뿐 자신이 비좁은 얼음 튜브 안에 있는 듯했다.

고생 끝에 앞쪽의 어둠이 점점 밝아지더니 드디어 밖으로 나온 그는 깜짝 놀랐다. 석굴도 나무도 자취가 사라졌다. 자신이 세운 3 미터 장대의 끝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천지가 하얀 벌판이었다.

팔모는 어려서부터 영성이 발달했던 것 같다. 전생의 오랜 수행이 쌓인 결과일 것이다. 18세에 ‘나는 카규파야’ 했던 것도 그렇고 인도에 가서 캄트룰 린포체를 뵙고 스승으로 모실 때도 스승만이 전생의 그를 알아본 게 아니었다. 팔모는 섬광처럼 스승을 알아보았고, 전에 알았으나 오랫동안 못 만난 옛친구를 만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스승이 1980년 입적하고 나서 환생하여 2살 6개월의 아기인 스승을 보았을 때도 상황은 같았다고 한다. 아기 스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뻐하면서 팔모를 알아보았다.

“내 제자 비구니가 왔구나! 내 비구니가 왔어.”

스승 캄트룰 린포체는 입적하기 전에 텐진 팔모에게 비구니절을 세우라고 여러 번 요청을 했지만 팔모는 그 뜻을 받들지 못했다. 1992년 그가 몸담고 있는 타시종 승원의 스님들이 다시 한번 요청을 하자 팔모는 기꺼이 그 어려운 일을 맡기로 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인도 북부에 세우려는 동규가찰링(Dongyu Gatsal Ling) 승원은 비구니들을 위해 드룩파 카규파 법맥의 승원을 열려는 것이다. 드룩파 카규파는 토그덴마, 즉 밀라레빠처럼 수행을 중시하는 스님을 키우는 전통을 가진 법맥이다. 팔모는 비구니를 위한 승원과 재가 불교도를 위한 국제여성수행센터를 세우고 싶은 것이다. 동규가찰링 비구니 승원은 주변환경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환경을 최대한 보전할 수 있도록 토속건축방식인 흙벽돌과 돌을 사용해 건축할 것이며 태양열 발전을 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 승원은 일부가 완성되어 많은 비구니들이 수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세한 것과 전체가 완성되려면 좀 더 시간과 노력이 들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약동하는 힘찬 여성 원리, 음의 원리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팔모는 여성의 몸으로도 깨달음을 얻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여성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21세기를 이끌어갈 비구니 수행자를 키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 동안 티벳이나 아시아권에서 비구니들의 수행이 꽃피어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이 서양 여성이 보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때 자격을 갖춘 비구니 교사가 충분히 공급될 수 있을 것이다. 팔모는 힘과 권위를 가진 것은 비구들이며 자신은 그저 여자이기에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에게 힘찬 메시지를 전하고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역할모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이전에 석굴에서 혼자 수행하던 시절과 지금 동규가찰링을 짓기 위해 모금 순회강연을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좋으냐는 질문을 받은 팔모는 개인적으로 자신은 수행생활을 더 좋아하기는 하나 두 가지 생활이 다 필요하고 또 각기 배울 점도 많다고 했다.

“혼자 있을 때 수행자는 잡다한 일에 마음 뺏길 겨를이 없기에 발전이 빠르다. 마치 압력솥에 모든 재료를 넣고 빠른 시간에 요리하는 것과 같다. 반면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 때는 혼자서는 기를 수 없는 덕성을 배우는 시간이다. 관대한 보시정신, 인내심, 사랑, 자비 같은 것들은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이는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들숨과 날숨처럼 이 두 가지 생활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