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길 바위벼랑 위에 핀 꽃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완주(完州) 불명산(佛明山) 화암사 (花巖寺)

2007-10-05     관리자

불명산(佛明山, 428m) 아래 너른 터에 차를 멈추고 나무그늘 드리운 숲길을 걸어 오른다. 때마침 길동무가 된 한 무리의 대학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르는데 어느새 길 한 발짝 옆으로 소리없이 물이 흐르고 있다. 언제부터 계곡을 따라 오른 것일까. 수정같이 맑은 물에 얼굴을 담그고 눈을 닦는다. 시원하고 차갑기가 투명한 물빛을 압도한다.
600여 년 전 화암사에 사셨던 해총 스님은 이 길을 ‘수십 길 되는 폭포, 바위벼랑의 허리에 한 자 너비의 가느다란 길’로, 국립경주박물관장 박영복 선생은 ‘천길 낭떠러지에 바위를 쪼아 만든 손바닥만한 너비’의 길로 그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화암사 길의 별스런 아름다움이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그 꿈 같은 길을 오르는데 아뿔싸! 계곡을 밟고 선 철계단이 그 꿈길을 송두리째 끊어놓고 만다. 폭포를 발 밑에 두고 오른 철계단 끝에 그 옛날 잊혀져가는 ‘벼랑길’이 풀섶에 가려져 있다.
몇 발짝이나 더 걸었을까. 숲 속에 맑은 물을 떨어뜨리는 2,3단의 아기자기한 폭포가 잃어버렸던 탄성을 자아낸다. 그리고 나면 곧 등산로를 개울 한쪽에 둔 화암사(花巖寺)의 우화루(雨花樓, 보물 제662호) 앞에 덜컥 다다른다.
빛바랜 나뭇결이 인상적인 2층 누각인데 아래 기둥 안쪽에 1층 높이만큼 석축을 둔 독특한 모습이다. 툭 터진 입구도 없고 석축 때문인지 도무지 그 안을 볼 수가 없다. 어디 재실이나 서원 앞에 서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렇게 떡 버티고 선 우화루는 주위의 울창한 나무들 때문인지 그 속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화암사의 존재가 숲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이름을 웅얼거리자 화암사는 곧 숲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사찰 앞의 반석 위에 관음조가 물고 온 하얀 모란꽃이 피었다거나 꽃의 서광이 당나라까지 비추자 병든 공주를 위해 사신을 보내와 꽃을 구해갔다는 류의 이야기가 화암사의 유래를 짐작케 해준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8년 “정승 등이 돌아가니 황모란을 전라도 고산현 화암사에서 구하여 진헌하였다.”는 대목이 들어 있다. 한편 절을 찾는 연세 지긋하신 노인들은 지금의 산신각 자리 바위가 연꽃이 피었던 곳이라고 일러주신다.
「화암사중창비」에 의하면 절 앞에 전단향 나무가 있었는데 그 향기로움이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 옮겨가 궁전 뜰에 심게 되었고 여기에서 화암사의 이름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전단향은 의상 조사가 서역에서 가지고 온 것.
이 비문(『완주군지』 참조)은 원효·의상 대사가 이 절에서 수도하였다는 내용을 토대로 화암사의 창건을 신라시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의 길고 긴 역사는 자간 속에 숨어 드러나지 않고 조선초에 이르러 성달생의 주도로 중창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세종 7년(1425)부터 시작하여 무려 15년에 걸친 것이어서 흥미롭다.
중창을 마친 이듬해(144 1) 비문(碑文)을 지었으니 시주자와의 인연을 강조했음은 알겠는데 선조 5년(1572)에 비를 세웠다 하니 130여 년의 그 사연이 더욱 궁금하기만 하다. 조선 전반기 불교에 의탁한 벼슬아치의 모습 또한 살펴볼 수 있는 값진 비문이다.
우화루 옆 계단을 올라 화암사로 들어서려니 견공 한 마리가 그 문턱을 베고 낮잠을 즐기고 있다. 절 문간을 지키고 계시니 사천왕이실까, 금강역사이실까. 조금 전 뵙고 왔던 저 아래 종남산 송광사의 우람한 수문장이 웃음을 머금는다.
견공의 안내를 따라 들어서는데 절마당에 시선이 멈춘다. 극락전을 비롯해 전각들이 마당을 빙 둘러 ‘ㅁ’자로 배치되어 있다. 마당과 건물의 석축 위까지의 높이가 불과 한 자가 될까 말까 하다. 마당이 작아서인지, 전각들로 에워싸여 있어서인지 답답하리란 인상마저 든다. 밖에서는 들여다 볼 수 없던 화암사가 그 안에서는 전각과 전각이 너무도 가까워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지경이다. 속엣것을 다 내놓으라는 듯. 여기서 스님들은 어떤 공부를 하고 계셨던 것일까.
극락전과 불명당(佛明堂), 우화루, 적묵당(寂默堂)이 마당을 둘러싼 안쪽 꽃잎이라면 화암사를 둘러싼 산줄기가 바깥 꽃잎이 된다. 겹꽃인 셈이다. 그리 생각하고 나니 우화루의 꽃비(雨花)가 더욱 그럴 듯하다.
적묵당 마루에 한참을 앉아 있자니 아무 생각 없이 극락전과 불명당, 그리고 고요가 내려앉은 절마당과 우화루를 오래도록 바라보게 된다. 문득 극락전과 불명당 사이에 철영재(綴英齋)가 눈에 들어온다. 철영재는 입을 삼가하라는 의미라고. 이름도 그렇거니와 자리한 위치 또한 생뚱맞다.
뜻을 그대로 풀면 화암사의 ‘꽃부리를 꿰맨다’정도가 될까. 닫혀진 화암사를 한송이 겹꽃으로 본다면 이 또한 풍수의 뜻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요적적한 적묵당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밝혀준다는 불명당이 마주보고 선 까닭에 새삼스레 그 뜻을 헤아리느라 이래저래 까막눈이 어지럽기만 하다.
최근 보수를 마친 화암사의 극락전(보물 제 663호)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하앙(下昻) 구조를 갖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로 알려져 있다. 하앙은 기둥 위에 배열된 포작과 서까래 사이에 길게 놓인 나무 부재. 밖으로 돌출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어 건물 하단으로 들이치는 빗물 등을 막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화암사의 하앙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 뚜렷한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일본 학자들은 한국을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우수한 건축기법이 직수입됐다는 주장을 펴왔다. 하지만 화암사 극락전에서 하앙이 발견됨으로써 일본 측의 주장에 쐐기를 박고 우리 나라의 발달된 건축문화를 다시 한번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쨍쨍한 햇빛이 화암사에서는 한결 부드러운가 싶더니 절마당에 드리운 그늘마저 점점 희미해진다. 화암사 중창비가 서 있는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니 높지 않은 산중임에도 불쑥 솟아오른 산들이 첩첩이 이어져 있다. 산그늘 드리우는 그 모습이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천년고찰 불명산 화암사(063-261-7576)는 금남정맥이 연석산(960m)과 주줄산(서봉. 1110m)을 넘어 대둔산에 이르기 직전, 시루봉을 중심으로 한 연봉들이 둥그렇게 줄지어 선 남쪽 산기슭 울창한 숲에 둘러쌓여 있다.
금남정맥은 장수 팔공산, 진안 마이산을 달려온 산줄기(금남호남정맥)가 완주 땅 주화산(565m)에서 북으로 300리를 내달리며 호남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대둔산과 나라에서도 큰 제사를 지내던 명산, 계룡산을 일구어 놓는 산줄기이다.
…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중에서 바위에 쪼아 만든 길, 옛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온다. 두 발로 서있기 위태한 곳에서는 때때로 산에 몸을 기대며 더듬더듬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