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30.타림 분지의 보석 카슈가르

신 왕오 천축국전 별곡 30

2007-10-05     김규현

“총령에서 한 달을 가면 카슈가르에 이르니….”

당나라 서역방어기지 총령진(蔥嶺鎭)이었던, 타쉬쿠르간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카슈가르로 향했다. 반나절을 달리니 설산 아래 넓고 아름다운 카라쿨리(Karakuli) 호수가 펼쳐졌는데, 그 곳에서 승객들은 잠시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360km나 달려서 파미르 하천의 많은 지류를 건너서 저녁나절에야 서역 최대의 오아시스 도시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해동의 나그네’가 하루에 온 길을, 혜초는 한 달을 걸어서 왔다고 정확한 이정까지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또 총령에서 걸어서 한 달을 가면 슈르(疎勒)에 이른다. 외국인들은 카슈가르국(伽師祇離國)이라고 부른다. 이 곳도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절도 있고 승려도 있으며 소승이 행해진다. 고기와 파와 부추 등을 먹으며 토착인은 면직 옷을 입는다.”

중국 내 다른 도시들과 달리 완연한 서역풍(西域風)이 물씬 풍기는 이색적인 이 도시를 현지인들은 ‘녹색 타일의 왕궁’이라는 뜻으로 ‘카슈가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러나 현재 이 지방을 ‘신강자치구(新彊自治區)’라는 이름으로 개편한 점령국 중국인들은 그냥 줄여서 ‘커스’라고 하여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지방은 한(漢)·당(唐)나라 때부터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의 관활 하에 있었지만 한때는 흉노, 돌궐, 회흘 등 이 지방을 중심으로 명멸했던 유목민족들이 실크로드의 패자로서 독자적인 왕국으로 번영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회흘(回紇), 즉 위구르족이 결국 땅은 차지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압제에서 풀려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분리독립운동으로 심심치 않게 무혈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중국 내의 전 위구르족의 마음의 고향인 이 도시는 혜초의 기록을 비롯한 고문헌에는 슈레(疎勒)라고 나타나고 있지만 현장은 카사(稿沙)로 적고 있어서 이 도시의 이름은 시대별로, 민족별로 각기 다르게 불렸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혜초는 현지인들의 명칭도 함께 병기(倂記)하였는데, 이 점에 대하여는 돈황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프랑스의 펠리오(Peliot)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혜초는 우리에게 8세기 전반기 (중략) 특히 서북인도, 아프카니스탄, 러시아령 투르케스탄, 중국령 투르케스탄에 관해서는 기타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식을 많이 제공해 준다. 그는 중앙아시아제국의 명칭을 통상적인 중국식 명칭과 함께 현지명을 기록해 놓고 있다. 예를 들면 슈르(疎勒)를 실제의 호칭인 카슈가르로 적은 것 등이다. 이 점은 이 방면의 첫 번째이며 또한 마르코폴로나 몽고시대의 기록보다 5세기나 앞서는 것이다.”

또한 현장도 “사람들의 성질은 난폭하여 거짓이 많고 용모는 비천하고 문신을 했으며 파란 눈을 가졌다. (중략) 불교를 깊이 신앙하며 복덕에 정진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런 기록들을 보면 이 지방의 원주민은 파란 눈의 투르크 계통의 혈통이지만 현장이나 혜초가 왔을 때는 독실한 불교도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전 서역이 반월도(半月刀)의 칼날 아래 들어갈 때 이 곳도 역시 그 태풍권으로 들어가 그 동안 이룩했던 찬란한 불교문화를 스스로 뿌리째 뽑아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천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상황은 그대로 변함없어서 시가지에는 ‘차도르’를 뒤집어쓴 여인들과 흰 빵떡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남자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푸른 하늘 위로는 모스크에서 울려나오는 ‘꾸란’의 독경소리만 가득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모르불탑(莫了佛塔)아! 너는 보았느냐?

이 카슈가르의 지정학적 특징은 타림 분지의 마지막 도시라는 데 있다. 타림 분지의 또 다른 이름은 타클라마칸인데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사막’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만큼 드넓고 막막한 죽음의 사막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는, 파미르를 넘어가면 중동이나 인도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타원형의 사막을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띠 같은 초원이 펼쳐지는데 그 사이로 오아시스가 점점이 박혀 있다. 그 곳을 연결하는 길이 바로 ‘실크로드(Silk Road)’인데, 예부터 주로 비단이 운반되었다 하여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이 명명한 후로 국제적으로 공인되어 사용하는 유명한 용어가 되었다. 비단은 한대 이전에는 ‘세레스(Seres)’라는 라틴어 이름으로 유럽에 알려졌다가 후에 영어로 일반화되면서, 20세기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 중의 하나가 되어 그 말 자체가 미지의 세계를 여는 ‘키워드’가 되었다. ‘역마살’을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사람치고 ‘실크로드’라는 말에 가슴 설레지 않을 이가 어디 있으랴!

이 ‘비단길’의 중간 지점이 바로 카슈가르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이 곳을 기점으로 동양과 서양이, 중국과 인도와 중동이 갈라지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이 비단 길의 두 갈래 길인 서역남로와 서역북로의 분기점이자 합치점이라는 것까지 더해져서 전 실크로드에서 가장 요충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수천 년 이어 내려온 동서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다른 방면의 교류는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관심사인 불교 쪽으로만 눈을 돌려도 이 도시의 위치는 우뚝하다. 바로 이 곳을 통해서 초기불교가, 간다라불상이, 우아한 불탑들이, 그윽한 석굴들이, 현란한 대승불교의 경전들이 전래된 것이다. 그 길목에 바로 카슈가르라는 관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법현, 현장, 송운, 혜생, 오공 같은 구법승들의 발길이, 또한 혜초와 고선지 같은 해동의 후손들의 체취가 묻어 있는 곳이 즐비하겠지만 현재는 모두 천년이란 세월 속에서, 이슬람의 인위적인 파괴 아래서 불교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래도 현재 이 도시는 서역의 보석이라는 별명답게 이국적인 풍치가 물씬 나는 볼거리들이 적지 않다. 비록 그것들이 모두 이슬람의 유적들뿐이라는 섭섭함이 물론 있긴 하지만….

우선 일요일마다 열리는 바자르(集市)는 옛 명성에 걸맞게 아직도 건재하다. 『한서(漢書)』 「서역전」에도 “슈레국은 장안을 떠나 9,300리이며…, 큰 시장이 있다.” 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2천년 지난 지금까지 여전하여 일요일이면 이웃 나라들의 상인들을 비롯해 온 서역의 온갖 문물이 모두 모여들어 성시를 이룬다.

그 다음으로는 에이티칼 모스크 사원에서의 기도 광경이나 향비(香妃)라는 청나라 때의 한 후궁의 묘 등을 둘러볼 만하지만, 무엇보다도 꼭 가보아야 할 곳은 바로 유일한 불교 유적지인 모르불탑이다. 서쪽 교외에 있는데, 차를 반나절 대절해야만 갈 수 있다. 천년의 무관심 속에 거의 폐허가 되었지만 그래도 웅장한 기상을 지키며 사막의 등대처럼 먼 미지의 세계를 응시하고 있는 듯 하였다.

‘모르(莫了) 불탑아! 너는 보았겠지. 우리 혜초 스님이 저 사막 끝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이 곳을 지나가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