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빛과 그림자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7-10-05     관리자

세상을 살다보면 행복이 있고 불행도 있기 마련인데 나의 기구한 운명은 너무도 험난하고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어렸을 때는 가난과 힘겨움에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학창시절에는 준비물을 제대로 못 가져 가서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 점심 때는 물로 배를 채워야 했고, 자취방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작은형님은 돈이 없는 죄로 사인도 못밝히고 자살로 처리해야만 했던 기막힌 시절이었다.
가난으로 고3 때는 실습을 나가 생활비에 보태야 했고, 야근을 주저 않고 일을 하던 나는 허약 체질로 병원문을 두들기기 시작하더니 ’90년 초까지 성바오로병원 내과(대장염과 알레르기 치료), 이비인후과(이명과 난청), 피부과(백납과 무좀), 신경정신과 등 4개 과를 다니면서 치료하면서 약을 먹어야 했다.
약에 취해서 오후가 되면 누가 때려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잃었고 결국은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했고, 직장에서는 권고사직 당하기도 했다. 정말 하루하루가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결국은 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 저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하소연하면 “그래, 모두가 부모 잘못 만난 탓이다.” 하고 울먹이실 때면 어머니를 붙잡고 같이 통곡을 하곤 했다.
결국은 자살할 결심을 하고 며칠 동안 방문을 잠그고 굶기도 하였지만 그 역시 실패였다. 이러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평소에 좋아하던 유적답사를 떠났는데, 그 곳이 여주 신륵사였다. 경내를 다 돌아본 후에, 나가려고 하는데 마침 기와불사 보시금을 받는 곳에서 발길이 멈춰섰다.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보시를 할까 망설이다가 일주문까지 갔다가 다시 기와 있는 곳으로 왔고, 또다시 망설이다가 다시 일주문까지 왔다가 다시 기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결국은 나의 발길은 대웅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초파일을 20여 일 앞둔 때라서 많은 불자들이 절을 올리고 있었는데, 나도 그 분들을 따라서 3배를 올리고 부모님 앞으로 연등을 접수하고 일주문을 나서니 그제서야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아, 내가 의지할 곳은 부처님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았고, 불교에 귀의하기로 다짐했다.
그리하여 여의도 연등축제에 참석했고, 부처님 오신 날 불광사를 처음 찾았고, 청년법등인 금강법등에 입회를 하고 매주 토요일 금강법등 모임에 나갔다. 자원해서 교무담당 보리보살 부촉도 받았다. 여름철 50일 기도와, 철야 정진법회에도 동참하면서 광덕 큰스님의 반야바라밀 법문을 듣기 위해서 법회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나에게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표정도 밝아졌고 생각도 달라졌다. 약에만 의지하던 것에서 벗어나 부처님께 의지하니 병도 낫는 것 같고 병원도 갈 필요를 못 느끼게 되었다. 또한 토요법회 사회자 겸 인례를 맡게 되었고 바라밀교육과 명교사를 이수하였다.
큰스님께 종인이라는 법명도 받았고, ’91년에는 금강법등 총무담당 바라밀보살까지 부촉받았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부처님과 법등 임원 활동에만 전념하다 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고 그냥 신이 났다. 그리고, 무릎에 손바닥만한 백납이 있었는데 색이 원래대로 까맣게 돌아오는 것을 느꼈고, 너무 좋아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모두가 부처님 덕이라고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몸에 다시 무리가 와서 직장을 그만 두고 보약을 먹으면서 몸을 추스려야 했지만 ’92, ’93년에는 토요법회 사회를 보면서 보현행원송 발표회에 동참했다. ’94년에는 청년회에서 나의 평생 도반을 만나 지오 스님의 주례로 불광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으니, 그 무엇이 부러울까? 너무도 좋은 나머지 자다가도 일어나서 내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그 행복도 잠시, l년 후인 ’95년에 일요법회 사회를 보면서 금강법등 마하보살을 맡아 청년회의 활성화를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하는 중에, 그만 10월에 위암 3기 선고를 받고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집안은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났고 연세 많으신 부모님이 충격 받으실까봐 두 분께 쉬쉬하고, 임신 중인 아내의 얼굴은 울어서 퉁퉁부었다. 그런 아내를 보는 내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지오 스님과 지성 스님께서 오셔서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고 나의 손을 잡으시고 기도를 해주시어 너무도 감사했다.
11월에 수술을 받고, 12월부터 ’96년 5월까지 항암제를 맞는 동안 홀몸이 아닌 아내가 보조침대에서 불편한 잠을 자면서 못난 남편 간호하느라 고생도 많았고 울기도 많이 하였다. 항암제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는 나를 챙겨 먹이느라 속도 많이 상했을 것인데, 그 보답을 언제 다 갚을 수 있을런지, 정말 고마운 아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다. 병원 내 불교법당에서는 지홍 스님께서 쾌유 기도를 해주셨고, 청년회에서는 일일찻집을 열어 도움을 주셨으니 너무도 고마운 분들이다.
’96년 5월에 항암제를 다 맞고 나서는, 이제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위를 3분의 2나 잘라냈으니, 식이요법을 지키며 식사를 하루에 6번을 조금씩 먹어야 했다. 또한 과로와 감기에 걸리지 말아야 했고, 직장에 나갈 때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하는 너무도 힘든 나날이었다. 그 때 범어사 순례법회를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광덕 큰스님을 뵙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스님,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속으로 스님께 빌었다. 그리고 “스님의 건강한 모습을 다시 뵙고 싶습니다.” 하고 발원하였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신경쓰고 우느라 편한 잠을 못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형님께서 ’97년 9월 경 대장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장남인 형님을 살리기 위해서 온 식구들이 나섰고 늙으신 부모님은 몸져 누워 버리셨다. 형수님은 눈물로 시간을 보낼 즈음 다행히 수술 경과가 좋아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시고 퇴원하시게 되었다.
형수님은 충격이 크셨는지, 어느 날 천주교로 개종을 하고 모든 식구들을 설득하여 성당에 나가서 세례까지 받게 하셨다. 일요일만 되면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니, 이 현실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 결과 작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모든 장례의식을 천주교식으로 해드려야 했다. 불자인 나는 눈치만 보고 있는데, 다행히도 청년 동문회 법우님들께서 독경과 염불, 기도를 해주시어 답답했던 내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수술 받은 지 이제 8년이 다 되었으나, 항암제 후유증으로 온 몸은 백납으로 하얗게 되었고 잦은 피로와 감기몸살과 가위눌림과 이명에 시달리고 있는 이런 내 모습이 너무나도 싫고, 세상 사는 것이 두렵고 힘들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헤매일 때 당신의 품으로 이끌어주신 부처님이 항상 내 곁에 계시기에 오늘도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서 불자로서 불광인으로서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어둠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불광사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찾았고, 광덕 큰스님의 반야바라밀 법문을 통해 내 생명이 어디에도 물들 수 없는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임을 확신하기에 오늘도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서 나 자신을 채찍질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이 또한 내 인생의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 정진, 또 정진할 것이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