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불교] 트룽파 린포체와 페마 최된

2007-10-05     관리자

최감 트룽파(1939~1987) 린포체는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밀라래빠를 배출한 티벳 카규파의 11대 활불이다.
활불이란 어떤 경지에 이른 불자가 입적한 후 다시 이전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태어나 최소한의 교육으로도 이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신학과 철학의 박사학위에 해당되는 켄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중국의 침략이 있자 티벳을 떠난 그는 인도에서 영국 여인 프레다 베디와 함께 일하다가 1963년 베디의 주선으로 옥스퍼드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아콩 린포체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며 영국시민이 된 그는 1968년 스코틀랜드의 대도시 카알라일 부근에 있는 에스크달뮈어(Eskdalmuir)에 삼예링 불교센터를 설립했다.

이 곳은 높고 낮은 언덕이 계속되는 아름다운 구릉지대에 파란 풀들이 자라고 있고 그 곳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가 곳곳에 하얀 점들로 보이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지방이다.

삼예링의 뒷편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어 사람들은 그 강을 따라 사람들은 행선(行禪)을 하기도 한다. 삼예링에는 공작새가 세 마리 있는데 이들이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울 때면 꼭 아이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절 주변으로 수십 마리의 야생토끼가 평화롭게 돌아다니는데 어딜 가나 그들을 목격할 수가 있다. 자유로운 삶을 사는 그 들토끼들은 진정 삼예링의 부처들 같아 보인다.

그러나 삼예링을 설립하고 1년 남짓한 때인 1969년 트룽파는 교통사고를 당해 심한 부상을 입었고 오랫동안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육체를 통째로 흔들어놓았던 그 교통사고는 그의 마음 역시 가만두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는 욕망을 감추며 그의 표현을 빌리면 ‘가사 뒤에 자신을 감추고 숨어사는 생활’을 해왔는데 이제 그 가면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기로 결심한다. 그는 가사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16세밖에 안 된 영국의 상류층 여성과 결혼하고는 영국사회의 빈축을 피해 단돈 50달러만을 손에 쥔 채 미국으로 이주했다.

비록 트룽파가 삼예링에 있던 기간은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후 아콩 린포체가 승원을 계속 일구어 현재는 유럽 제일의 티벳 승원으로 자라났다. 현재는 아콩 린포체의 동생인 예세 라마가 승원장으로 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카톨릭 신부님들과도 좋은 유대를 가지면서 서로의 행사를 지원하고 참여하며 또 삼예링이 매입한 작은 섬 홀리 아일랜드(Holy Island)에 초교파센터(Interfaith Center)를 짓고 있다.

트룽파는 천재적 언어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분명 영어를 제2 외국어로서 배웠지만 어찌된 일인지 본토인보다 영어를 더 잘했다. 게다가 다양하고 풍부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었고 거기에 거침없는 성격까지 갖추었던 그였기에 그가 표현해내는 언어들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서구인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는 다만 영어를 한 것이 아니라 서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말했던 것이고 그것도 그들보다 훨씬 더 잘 짚어주었던 것이었다. 그때까지 서구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어려운 불교 용어와 교리들이 그의 입을 거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후 사람들은 불교 서적 번역에 그의 정의를 사용하고는 했다고 한다.

대담하고 격식이 없는 행동, 때로는 정상을 벗어난 행동을 하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던 트룽파 린포체는 전통적인 비구나 스승의 이미지에 맞추기를 단연코 거부했다. 그는 아시아와 미국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혼합하여 가르침에 사용했다는 평을 듣는다.

1800년대에 소로우가 반은 일구어놓은 미국불교의 밭을 60년대에 기존문화에 반기를 들었던 성난 젊은이들이 조금 더 갈아주었고 이후 이들을 불교권에서 흡수하면서 미국불교가 전면적으로 일구어지게 된다. 이때 선불교의 스즈키 순류와 티벳불교의 트룽파의 격식을 벗어난 본원적인 우정으로 말미암아 미국불교의 성장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단호했고 예측 불가능하여 페마 최된 스님은 은사인 트룽파 린포체를 아무리 애써도 사랑할 수가 없어서 울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린포체는 어떤 틀에 매이는 것을 제일 싫어했던 것 같다.
예불법이나 어떤 의식을 가르치고 난 후 제자들이 그에 익숙해져서 서로가 그건 틀렸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때쯤 린포체는 앞서 가르쳐준 것은 다 틀린 것이니 지금부터 가르쳐주는 방식대로 하라고 폭탄같은 선언을 했다고 한다.

황당하지만 스승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제자들이 다시 두 번째 방식에 익숙해질 때쯤 린포체는 다시 또 방법을 바꾼다.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덧 제자들은 알게 된다고 한다. 아무 것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무상의 원리를 체득한 것이다.

트룽파 린포체의 제자로서 미국 대중의 마음에 가닿는 설법을 하여 대중의 주목을 받은 이가 페마 최된(Pema Chodron) 스님이다. 페마는 ‘연꽃’이라는 뜻이고 최된은 ‘다르마의 횃불’이라는 뜻이다. 매우 잘 웃고 따스한 성품을 가진 그는 횃불보다는 은은한 화롯불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1936년 뉴욕에서 태어났고 버클리에 소재한 UCLA를 졸업했다. 티벳 불교에서 몇 안 되는 비구니 스님이며 금강승 수행을 완성한 최초의 미국인이다. ’70년대 초 은사 트룽파를 만났고 1974년 그의 나이 37세에 칼마파에게 사미니계를 받았다.

3년 후 칼마파는 비구니계를 받으라고 독려했고 티벳불교에는 그런 것이 없었으므로 최된은 프레다 베디의 조언을 받아들여 1981년 홍콩에서 집단 수계식을 통해 비구니계를 받았다.

트룽파는 최된에게 북아메리카 대륙에 승원을 하라고 독려했고, 최된의 모금과 활동으로 캐나다 노바 스코샤에 감포 승원이 세워졌다. 1983년 승원이 완공되고 최된이 총무스님이 되었다.

감포 승원은 서구에 제일 처음으로 세워진 티벳불교 승원이었다. 그러나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감포 승원은 티벳 승원처럼 보이지 않는다. 트룽파 린포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구 승원이지 티벳 승원이 아니라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페마 최된은 28살이 될 때까지 미국 중상류층 가정의 딸로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일찍이 변호사였던 남편과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던 그는 그 무렵 정신적인 눈을 뜨게 된다. 버클리에 살면서 대학으로 되돌아갔다가 60년대 미국을 휩쓸던 히피문화에 젖어들면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혼과 결혼이 이어지면서 서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은 연인이 아니라 정신 수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비구니가 되는 것에 대해 가족이 쉽게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60년대에 십대를 맞이한 아이들이 보기에 엄마의 행동은 시대가 원하는 여성상이었다.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어머니를 페마 스님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일이 5년 전이나 5년 후에 일어났더라면 아이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을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엔 때가 있는 것인가보다. 물론 계를 받았지만 처음부터 완전한 승가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3년간은 머리도 깎지 않고 낮에는 평상복을 입고 샌프란시스코의 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빠 집으로 가서 아이들도 도와주고 밤에는 다르마다투(티벳불교센터)에 돌아와 가사를 걸치고 일을 했다.

페마 최된은 아이들이 18살, 20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콜로라도 주 불더로 와서 승원장 자리를 맡았다.

페마 최된은 현재 서구불교계에서 중진스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 엘리트 출신 베이비붐 세대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그녀는 사랑의 기쁨과 상처, 결혼과 이혼에 따르는 고통,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로서 비구니의 길을 택한 고뇌 등을 두루 체험했기에 현시대 미국여성들이 직접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가르침을 솔직담백하게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