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휴식년(年)

지혜의 향기/ 휴식

2007-10-05     관리자


결혼과 함께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워낙 독립심이 강하고 성취욕도 있던 터라, 내 일을 그만두고 살림하는 주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결혼 전부터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모처럼의 휴식이라고 생각하자. 얼마나 여유 있을까. 책도 보고, 영화도 실컷 보고, 한가로운 낮 시간에 거리도 거닐고 팍팍한 회색 대신 초록색만 보고 살자.’ 그러나 겉으로는 “가사도 노동이다! 주부도 직업이다!”라고 인식하고 주장해 왔건만, 정작 내 일이 되자 그렇지가 못했다. 어느 것 하나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고, 왠지 모르게 초조하고 초라했으며 신경질적이기도 했다. 아마 내 스스로가 못나졌다는 자격지심이었으리라.
남편의 벌이에 대해서도 소중함과 감사보다는 삐딱한 마음이 앞섰다. 남편이야 “내 것, 네 것이 어딨냐?” 하는데 그게 영 내 것 같지는 않더란 말이다. 지출을 의논하는 남편에게 “당신이 벌었으니까 당신 마음대로 쓰셔.” 번번이 이런 말이나 뱉질 않나.
남들이 가사분담을 토론할 때, 우리 부부는 10년을 주기로 돌아가면서 돈 벌고 살림하자는 엉뚱한 발상을 했던 남편은, “하이고~ 내가 벌기에 망정이지. 행여 네가 버는 돈으로 살았다가는 한 푼도 못 쓰게 할 거여. 그러고도 남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6개월 동안 살림과 가정 경제에 대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럭저럭 결혼 생활에도 적응이 됐나 보다.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놀고 있는 게 아니라 시한이 있는 휴식 기간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갑자기 불어난 시간적 여유를 감당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정작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가치관의 전환이 이루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남편 덕이 크다. 나의 잠재력을 믿어주니 고마운 일이지만, 내 덕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게 될 거라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부담감을 수시로 안겨주니 말이다. 미래에 대한 투자로 새롭게 뭔가 배워볼까 한다. 이 시점이 내 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
아침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이불 속에 쏙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 빙그레 웃음이 난다.
전화가 온다.
“안 피곤해?” “어, 난 잤지.”
부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남편의 한 마디.
“좋겠다. 9년 6개월 남았다.”

이정미 님은 (주)이젠코리아 웹 기획자, 휘경여중 교사로 일하다 결혼과 함께 청주로 내려가 전업주부로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