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엄마, 구슬보살님

불광이 만난 사람/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김인숙 교수

2007-10-05     관리자

“ 늘 바쁜 우리 엄마… 장년한 두 아들과 한 딸의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집안의 맏며느리이자 다섯의 동생을 둔 한 집안의 맏딸이기도 한 우리 엄마. 여기에 수십년간의 교직생활과 사회봉사활동 및 종교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틈틈이 멋내시는 일에도 전혀 소홀함이 없으시다. 정말, 목걸이에 알알이 구슬을 꿰듯 안팎으로 줄줄이 하는 일이 많으신 우리 엄마다.
…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의 구슬을 모아 오셨다. 세월의 때가 묻어 빛을 바래버린 구슬들이지만 닦고 다듬어 길고 짧은 목걸이, 작고 큰 브로치를 만들고 계신다. 빛 바랜 구슬들은 엄마의 손을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딸이라서가 아니라 엄마의 작업들을 여러 사람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특별하고 신선하다. …”
2003년 6월 딸 영은이가
김인숙(64세,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의 전시회(2003년 6월 5일~6월 19일, 성곡미술관) 초대장 ‘구슬 목걸이 이야기’에 담긴 영은(서양화 전공) 씨의 이야기가 6월의 햇살만큼이나 싱그럽다. 엄마에 대한 존경과 자랑스러움이, 그리고 사랑이 알알이 배어나온다.
딸 영은 씨의 말에 의하면 취미로 시작한 엄마의 구슬 작업들은 마치 습관처럼 전화 통화 중에도, 식사 중간중간에도, TV를 보시면서도, 또 이른 아침에도, 늦은 밤 시간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한테 붙여준 애칭이 ‘구슬 보살님’이라고.
올해를 정년으로 대학 교수직을 은퇴하는 ‘구슬 보살님’ 김인숙 교수가 구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부터다. 전시되는 작품들은 한국은 물론이려니와 그가 80년대 초반부터 외국에 갈 때마다 골동품 상점이나 주말 벼룩시장을 찾아가 구입한 구슬들을 손수 꿰어 만든 것들이다. 멕시코의 일요시장, 인도 봄베이 골동품 시장, 런던·뉴욕·모로코·투니지아 등등 그가 그 동안 구슬을 구하고자 찾아간 나라만도 20여 개 국이 넘는다.
“산호와 비취·수정·진주·동구슬·백옥 등등 마음에 드는 구슬을 발견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흥분이 되곤 했어요. 구슬들이 오랜 세월을 숨쉬고 살아온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졌거든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지요. 구슬들을 닦은 뒤 새벽 4~5시까지 밤을 꼬박 새워가며 목걸이를 만들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색깔·크기·무게 등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꿰어보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스타일의 목걸이가 나오는데 그것을 보는 기쁨도 정말 커요.”
밤을 꼬박 새며 ‘구슬 목걸이’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마치 신선한 행복을 마시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걸이 중 400여 점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전시회에서 얻어진 수익금은 각막 ·장기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새생명광명회와 인도 다람살라에서 직접 데려온 티베트 유학생을 지원하는 데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달라이라마 성하의 방한이 무산된 것을 사죄하기 위해 2년 전 다람살라에 갔다. 그 인연으로 티벳 임시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에서 ‘라나’라는 티베트 여학생을 추천받아 국민대학교 대학원(식품영양학 전공)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앞으로도 재정이 허용하는 한 티베트 유학생이 한국에서 전문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불교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영롱함, 고급스러움, 기품, 의외성, 대담성… 정말 멋져요.”
누구보다도 김인숙 교수 본인이 걸면 가장 잘 어울려 보일 것 같은 목걸이들을 보며 모두들 탄성을 자아낸다. 그저 취미삼아 모으고 꿰었던 것들인데 많아지다 보니 나누기로 마음 먹고 전시회를 계획했지만 전시회 결과와 관계 없이 좋은 뜻을 갖고 시작한 일이라 마음만은 뿌듯하다고.

쌍용그룹의 창업주 고(故) 성곡(省谷) 김성곤 회장의 맏딸이기도 한 김인숙 교수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던 중 1975년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불심이 돈독한 어머니 불국생(佛國生) 보살님을 따라 신행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커다란 느티나무와도 같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1975년 음력으로 1월 15일, 겨울안거 해제일이었다. 덕분에 전국의 큰스님들께서 아버지를 위해 5일 동안 끊이지 않고 염불해주셨고, 어머니와 함께 49재와 100재를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신행하게 되었다. 한국유권자연맹의 기초발기인으로 참가하고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후원하면서 ‘한국여성계의 대모(代母)’로 불릴 만큼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앞장섰던 어머니는 참으로 베풀기를 좋아하셨던 분이었다. “당신은 간이 안에 있기에 망정이지 밖에 있었으면 벌써 누구에겐가 떼어주었을 거야.”
아버지도 어머니께 늘 그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김인숙 교수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배웠고 또 딸 영은 씨가 어머니에게서 가장 많이 들어온 것은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니 항상 봉사하라.”는 말씀이셨다고.
“봉사라는 것은 꼭 돈만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지요. 길 가다가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하는 노인을 부축해주는 것도 봉사요,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찾아주는 것도 봉사요, 요즈음은 먹고 살만한데도 왜 그렇게 고민들이 많은지. 고민이 많은 사람들 이야기를 성의껏 들어주는 것도 봉사가 아닐 수 없지요.”
딸 영은 씨의 기억으로는 어머니는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옷이며 장난감, 생활필수품 등을 모아서 고아원이며 신체장애자, 양로원에 보내셨다. 한두 박스가 아니라 지하실 창고에는 수십 박스의 물건들이 늘 가득 쌓여 있었고 어머니는 그것들을 모으고 전해주기에 바쁘셨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머니는 참으로 부지런하시고 무슨 일이든 신명나고 활기차게 하신다. 마치 한 알 한 알 구슬을 실에 꿰듯 가정사며 사회활동이며, 학교의 일들을 척척 잘도 꿰셨다.
또 한 가지 어머니 손에 항상 들려져 있는 것은 책이다. 잠들기 전에도 꼭 책을 읽다 잠드시고, 어디를 가든 어머니의 가방 속에는 항상 책이 가득하시다고.
“전생에는 아마 인도사람으로 호강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좋은 것이 이렇게 좋으니 말이지요. 그래서인지 이생엔 일하러 온 것 같아요. 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거든요.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제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고 또 건강의 비결이기도 하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참선이겠지요?” 김인숙 교수의 자락이 워낙 넓다보니 연일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았다.
“잘 왔어요. 고마워요. 점심은 드셨나요. 찾아주셔서 미안하고 고맙고…. 차 드세요”.
학교 수업 후 땀땀이 들른 김인숙 교수는 전시장을 찾은 이들에게 일일이 손을 내밀며 따뜻하고 편안하고 푸근한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전생에는 티벳의 어느 지체놓은 집안의 따님이셨던가. 현세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보살도를 베푸시는 아름다운 마음, 그 마음 꿰어서 구슬같이 내세까지 이어질진저.”
- 전시장 방명록 중
붉은 빛·푸른 빛·노란 빛·하얀 빛… 손맛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원석들을 근사하게 꿴 목걸이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지만, 닦을수록 속빛이 나는 구슬 같은 마음을 가진 ‘구슬보살님’ 김인숙 교수의 따뜻한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듯 은은한 빛살이 전시장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