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源諸詮集都序

지상강단[16]

2007-10-04     관리자
  머리말

 「선원제전집도서」의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이 어록이 어떠한 배경 하에서 편찬되었으며 또 저자의 생애와 사상은 어떠하였으며, 나아가 이 어록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고 유통과정은 어떠하였는가를 앞으로 3회에 걸쳐 설명해 보고자 한다.
  제 1회에는 저자인 규봉종밀선사가 살았던 시대적인 사회적 배경과 불교사상, 그리고 그러한 사상의 변모에 대하여 살펴보고 제 2회에는 규봉종밀선사의 생애와 그의 사상적 편린을 더듬어보고 그리고 제 3회에는 이 선원제전집도서의 내용과 유통과정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규봉종밀선사가 살았던 사회적 배경

  종밀선사는 이 선원제전집도서를 저술한 뛰어난 불교학자로서 당(唐)의 건중(建中) 원년(780)에 태어나 회창(會昌) 원년(841) 정월에 입적하여 62년간을 살았다. 선사가 살았던 시기는 바야흐로 시대의 전환기였다. 당조(唐朝)의 권위를 붕괴시킨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직후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맹아가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하던 때이다.
  정치적으로는 당조의 중앙권력체제가 흔들리고 민정(民政), 재정(財政), 군사를 장악한 강대한 지방세력이 서로 다투어 봉기하고 제정적으로는 균전제(均田制)가 붕괴되고 새로운 토지 지배의 형태가 생겨난 중국 역사상 가장 엄청난 변혁의 시기에 놓였었다.
  불교사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문불교에서 실천불교로 번져가는 시기로서 당시 당조의 권력아래 지지되고 보호 받던 화엄종, 법상종, 밀교 등의 제종파는 당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쇠퇴하고 신흥관료나 지방권력의 지지를 받던 선종(禪宗)이 중국불교의 주류가 되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전환기를 살펴보면 6세기 말에서 8세기 말까지의 약 200여 년간에 해당하며 불교 제종의 성립과 변모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중국불교의 제종의 성립 • 변모는 어떠하였는가.

  제종의 성립과 변모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중국 독자의 제종이 성립한 것은 6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서였다. 북주(北周)의 무제가 엄격한 폐불훼석을 단행하고, 북위 이래로 융성의 일로를 달려왔던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불교를 일거에 차단하였는데, 오히려 이는 중국인 불교로서의 새로운 사상을 창출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생명력 있는 불교 각종의 어린나무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천태지이(538~597)선사는 북주의 폐불을 체험하고 자각하여 천태종을 성립하였는데 그 사상은「즉사이진(卽事而眞)」에 바탕을 둔「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이었다. 즉 현실 속에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수행법으로는 지관(止觀)을 확립하고 후에 선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길장(549~623)대사는 구마라습의 전역(傳譯)에 의한 용수사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삼론종을 대성하였는데 종지는 반야 • 공의 이론적 추구요, 실천적인 면에서 우두선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당대에 이르러 경전을 구하러 인도로 건너갔던 현장(600~664)이 귀국하여 유식설을 전하고, 그의 제자인 자운대사 규기(632~682)는 새로운 종파로서의 법상종을 성립, 장안불교계를 일깨웠다.
  화엄종은 두순(557~640)에 의해 개창되었으며 2조에 지엄(602~668), 3조에 법장(643~712)으로 이어졌다. 화엄종의 교리는 화엄경의 원융한 사상을 바탕으로 공관(空觀)과 유식의 교설에 근거하여 성립하였다.
  현종조에 이르러 인도에서 선무외(637~735), 금강지(671~742), 불공(705~774)이 각기 중국에 건너와「대일경」,「금강정경」등 밀교경전을 전했다. 주술 • 기도를 실천수행의 덕목으로 삼는 밀교는 내도량(內道場)을 주로 한 궁정불교로서 위세를 떨쳤다.
  이와 같이 7세기에 성립된 중국불교가 한 때는 주춤한 적도 있었지만 8세기 후반에 이르러 각 종파에 뛰어난 불교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리하여 종파의 세력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치달았다.

  각 종파의 세력과 불교학자들

  천태종에서는 담연(711~783)이 나와 지이대사의 저서에 주석을 가하고 천태교학을 부흥시켰는데, 담연의 사상은 지이의 사상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지이의 학설은 성구설(性具說)이었지만, 담연은 화엄의 성기설(性起說)과 기신론의 진여설(眞如說)에 자극을 받아「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중요시 하였다.
  담연에 필적할만한 이가 화엄종의 증관대사 청량(738~838)이었다. 증관은 남산 율종의 담일에게서 율을, 담연에게서 천태학을, 금릉의 현벽과 성도의 혜량에게서 삼론학을 배웠다. 선종에 대해서는 우두, 경산, 무명에게서 남종선을, 혜운에게서 북종선을 받았으며, 또 혜원의 제자 법세에게서 화엄교학을 배웠다.
  그리하여 증관은 천태학, 화엄학, 삼론학, 선, 율에 통달하였으며 이 모든 것을 화엄에 의해 통일시켰다. 종합적인 불교교학의 수립은 중당(中唐)에 있어서 일대 위관이었으며, 본서의 제자 규봉종밀이 이 증관에게 사사, 화엄의 학적 체계를 세우고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함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는 반야 • 공사상을 중국인의 사유로서 채택한 사람으로「조론」을 남겼는데 이 저서에 담긴 그의 사상이 천태 • 화엄학의 부흥 외에 중당의 불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승조의 작이라 일컬어지는「보장론」이 있다. 그러나 실은 승조가 쓴 것이 아니고 중당의 누군가가 이 논문을 쓰고 승조의 찬술이라 한 것이었다.
  이「보장론」의 구절을 최초로 인용한 사람은 규봉종밀이었다. 이 무렵 중당의 불교계에 위작경전「원각경」이 나타났는데 이 경을 발굴하고 그 주석을 쓰는 등「원각경」의 연구에 전력투구한 이도 규봉종밀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 어록이 선원제전집도서인 만큼 당시의 선종(禪宗)상황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되어 특별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서력 500년 전후 보리달마가 동점(東漸)함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제 5조 홍인 하에서 두 파로 분립하였다. 신수(606~706)는 북종의 개조로 장안불교계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으며, 혜능(638~713)은 남종의 개조로 후에 중국 선종의 주류를 형성하는데 기틀을 다졌다.
  북종선은 신수 뒤로 보적(651~739), 의복(658~736)이 나와 세력을 굳혔다. 따라서 북종선은 일찍이 신수에게 배우고 뒤에 혜능에게 사사했던 하택신회에게 배척되었다 하나 8세기 말까지 존속했다. 증관도 북종의 혜운에게 사사한 적이 있으며, 또 북종의 석장(708~800)은 8세기를 누볐고 북종 최후의 계통을 승계한 숭규(756~841)는 종말과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4조 도신으로부터 방출한 우두종(牛頭宗)은 법융(594~657), 지엄(575~654), 혜방(629~695), 법지(635~702), 지위(646~722), 혜충(683~769)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주로 7세기에 활약하였는데, 8세기에서도 학림(668~752), 경산(714~792), 조과(741~824) 등이 활약했으며, 특히 경산은 화엄의 증관에게 우두선을 전했던 자이다. 우두선은 종밀의 본서와「승습도」에 기록된 대로 반야공관의 실천적 전개였다.
  5조 문하로부터 나온 염불선의 계통은 혜안(582~709), 지선(609~702), 처적(665~732), 무상(684~762), 무주(714~774), 승원(712~802)으로 전개되었는데 특히 무상은 종밀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무상의 제자에 신회(하택신회가 아님, 718~794)가 있는데 이에게서 법계를 받았지만 종밀은 이를 숨기고 하택신회의 제자 도원으로부터 하택선을 계승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종밀의 사상을 연구 • 고찰함에 있어서 정중사 신회의 계통은 충분히 고려해야 하리라.
  한편 6조의 제자로 남악회향(677~744), 청원행사(?~740) 두 사람이 있고 남악에서 홍주종이, 청원에서 조동종이 생겨났다. 홍주종은 마조(707~786), 백장(720~814), 천왕(738~818), 남전(748~835), 조주(778~897), 황벽(?~850), 임제(?~867) 등의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는데 종밀과 동시대, 또는 전후세대를 살면서 남종선 정계(正系)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조동종은 석두(700~790), 약산(745~828), 운암(780~841) 등이 배출하였지만 종밀은 일체 언급을 회피하였다. 같은 계통이 아니어서였을까.
  마지막으로, 하택종은 신회(668~762)의 제자로 법여(723~811), 무명(722~793), 유충(705~782), 신조(?~838) 등이 있었건만 종세(宗勢)는 800년을 경계로 급격히 쇠퇴하였다.
  규봉종밀은 하택종의 위세와 사상에 자기의 전 운명을 의탁하였다. 하지만 하택종의 급격한 쇠퇴로 인하여 그의 사상적 혼란은 야기되었다. 살펴보면 9세기 중국선의 주류는 홍주종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종래의 선사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독자적인 선풍의 경지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홍주종이야말로 이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역사적 정신적인 면에서 지주가 되고 또 중국선의 본류(本流)임을 규봉종밀은 형안을 갖고서도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교가(敎家)와 선가(禪家)의 두 입장을 근거 • 포착한 종밀의 한계가 있었다고나 해야 하지 않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