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을 향해서 오신 부처님

불광법단

2007-10-04     관리자

경전 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청련, 백련, 홍련이 물 위에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설법할 것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중생들 또한 제각기 근기가 달라서 깨닫는 이도 있을 것이기에 범천에게 말하기를, “내 저들 중생들을 위하여 감로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묵은 생각 버리고, 낡은 생각 버리고, 그릇된 소견을 버리고, 선입견을 버리고 들으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제왕의 자리도 물리치고 왕관도 벗어 던지고 젊음도 영화도 이 세간 그 모두도 버리고 출가한 것은 세간에 얻을 수 없는 것 때문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 생사라고 하는 것이 눈 앞에 닥쳐와서 순간순간 나에게 덮쳐지고 있는데 이 생사문제를 놔두고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마침내 출가하시고 수행하시고 생사 없는 도리를 얻으셔서 우리들에게 무한의 법으로 굴려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이 법을 전할까

부처님 법문을 받아들이려면 묵은 생각을 다 비워버려야 합니다. 제 소견을 따로 가지고 맞는다 안 맞는다 하고 저울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탐욕심과 사견과 교만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서는 지혜를 가리기 때문에 이 생사가 없는 도리를 손에 쥐어주어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은 미혹한 중생들이 탐욕에 젖어서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오히려 비방하고, 비방한 결과 악도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서입니다. 범천은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것을 결정하는 것을 보고 예배드리고 환희해서 돌아갔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법을 설할까.’ 하고 맨 처음에 생각하신 분이 ‘알라라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라고 하는 두 선인들인데, 당신께서 선정(禪定)에 들어서 보니까 벌써 한 분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고, 또 한 분은 전날 돌아가셔서 전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이 법을 전할까.’ 그 다음에는 다섯 비구를 생각합니다. 다섯 비구는 카필라성에서 태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낸 사람들이라고도 하고, 웃다카 라마풋타 회상에서 법을 이어받고 그 제자들의 교단을 통솔해 달라고 했을 때 “최상의 진리가 아니다.” 하고 뛰쳐나올 때 부처님을 따라서 나온 비구들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카필라성에서 보내서 그 쪽 선인들과 함께 수행하다가 역시 싯다르타 태자를 따라서 함께 수행해왔던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마는, 어쨌든 다섯 비구는 부처님께서 고행은 수행의 길이 아니라고 깨달으시고 음식을 드시는 것을 보면서 “이제 싯다르타도 타락했다.” 하고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 분들은 녹야원에 가서 따로 살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붓다가야라고 하는 곳에서부터 수백 리는 떨어진 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곳을 향해서 갑니다. 당신을 믿지 않고 떠난 사람들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모두를 향해서 오신 부처님

다섯 비구를 찾아갔다는 것은 우리 모두를 향해서 오신 것입니다. 고뇌에 빠져 있는, 묵은 생각에 빠져 있는, 교만에 빠져 있는 우리를 향해서 부처님이 걸음을 옮겨오신 것입니다. 49일 중 마지막 7일에 그렇게 결정을 하셨습니다.
최초의 성도 후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사람이 ‘파타가사나’, ‘피타가리’라는 두 상인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수레를 끌고 가는데 소가 갑자기 멈추고 아무리 채찍을 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 문득 곁에 한 젊은 사람이 나타나서, “부처님이 지금 여기 머무신다. 당신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최초의 사람이 되라. 부처님은 49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신 바가 없다.” 하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소가 안 가니까 실랑이를 벌이다가 아마 부처님을 발견하게 되었나 봅니다. 부처님은 태양 같은 광명을 놓고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광명,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실지로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우선 상인 두 사람이 부처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예경을 드리고 나서 꿀과 미숫가루와 우유를 타서 부처님께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드셨고, 그 인연으로 최초의 제자 두 사람이 탄생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공양을 드시고 나서 최초로 만난 사람이 ‘우파카’라고 하는 고행을 하는 수행자입니다. 그 수행자가 부처님을 만났을 때도 광명이 넘치는 부처님의 모습에 먼저 놀라서 물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누구를 의지해서 출가하셨습니까? 당신의 스승님은 누구십니까?”
“그렇게 해서 나는 해탈했다. 이 도는 내 스스로 증득했으므로 나에게는 스승이 없고 나와 비할 자가 없고 나와 같은 자도 없다. 나는 일체 지자, 일체 승자다.”
부처님은 대답을 하십니다. 부처님은 무엇에도 더럽혀진 바 없고 모든 것을 버렸고 모든 망념, 모든 망상 모든 것을 다 털어버렸고 그 때묻은 것 망념을 털어버린 것뿐만 아니라 안으로 헐떡거리고 구해서 제 것을 만들려고 하는 애착심, 애갈심, 그 욕심을 멸진해 버렸습니다. 멸해서 다해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을 때 “나는 일체 지자, 일체 승자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닦아 완성하셔서 최상의 지혜에 이르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법을 설하기 위해서 다섯 비구가 있는 녹야원으로 간다. 어두운 이 세상에 감로의 북을 울리리라.” 하고 그에게 말합니다.

어둠 속에 감로법을

어둠 속에서 생사가 반복되고, 수많은 고통을 또 쌓고, 어두움 가득한 이 세간 언제부터인지 시작 모를 저 옛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여기에 진리의 빛이 비춰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둠의 세간에 생사가 없는 감로의 북을, 감로의 설법을 내가 내리리라.” 하고 ‘우파카’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파카는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내가 닦는 도가 최고다.” 하고 제 속에 교만한 생각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혹 그럴지도 모르겠지.” 하고 빈정대며 가버렸습니다. 이처럼 교만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법문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 법문을 비판하고, 스님들을 비판하고, 법사를 비판하고, 법회를 비판하고, 그릇된 생각들이 꽉 차서 자기에게 알맞는 대우와 자기에게 알맞는 이론과 자기에게 알맞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자세를 가지고는 그 감로의 법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다 비워서, 마침내 묵은 생각을 다 비워버려서 맑은 그릇, 빈 그릇이 되어야 법문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마음을 비우자.” 그럽니다. 마음을 비우고 법의 기쁨을 가져가시기를 빕니다. 우파카와 같은 교만한 생각이 우리에게는 없는가? 그런데 사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여러 형제들과 달라서 저는 교만심으로 뻗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반성이 됩니다마는 그 전에는 더했습니다. 절에 갔을 때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신통하게도 제가 지어낸 것이 있습니다.
“코를 땅에 끌자.” 워낙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만심, 교만심이 꽉 차 있었기에 아마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선방에 겨울에 가서 마당 쓸고 눈 쓸고, 도구가 없으면 손으로 다 담아내면서도 스님들을 열 번 만나면 열 번을 코를 땅에 댈 정도로 절을 했습니다. 아마 제가 지나치도록 했는지 아무개 스님(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이 “그렇게 안 해도 돼. 금방 보고도 또 저러네.” 하셨습니다.
사실 그 스님을 존경해서 절을 했어야 했습니다마는 제 속에 있는 뭔가 꺾어 버릴 생각이 더 간절했었습니다. 그래서 절에 가서 마당을 쓸고 흙을 파고 지게질을 하고 거름을 나르고 채소를 가꾸면서 살았습니다. “코를 땅에 끌자.” 그 때 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만한 생각이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도 반성이 됩니다.

생사가 없는 법을 전하시다

부처님은 설법을 하시기 위해 누구를 향해서 오고 계시는가?
대답은 부처님의 법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어둠을 찾아서, 미혹을 찾아서, 불신자를 찾아서, 악한 것을 찾아서, 대립된 자를 찾아서, 불행과 고난에 빠진 자를 위해서 부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동시에 거기에는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우월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기쁨과 환희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부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불신자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싯다르타는 타락한 자다. 고행을 하고도 도를 이루지 못했는데 저렇게 음식을 먹고 고행을 버리고서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떠나자.” 하고 떠났습니다. 떠난 다섯 비구가 보니 멀리서 누가 옵니다. 싯다르타 태자입니다. “싯다르타가 오는구나. 우리 인사도 하지 말고 자리도 권하지 말고 상대하지 말자.” 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다가가시자 금방 자리를 권하고 발 씻을 물을 갖다드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불신하고 있는 이를 향해서 부처님은 오셨습니다. 평등하게 일체 중생에게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은 당신의 깨달은 경지가 근원적인 무상법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깨달은 바 이 법에 머물러서 이 법으로 살리라.” 부처님은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법으로 영원하십니다. 법을 설하기 전에도 그렇고, 법을 설할 때도 그렇고, 설하고 나신 다음에도 그렇고, 언제나 그 법으로 계시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그와 같은 법이십니다. 법 자체로 계십니다.
세 번째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핵심 내용,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우리를 미혹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속박에서 자재를 얻게 해주시고 우리의 소망 하나하나를 다 거두어 주시는 완전 원만하신 자비하신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향락이나 일시적인 기쁨을 위해서 부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생사가 없는 법, 생사를 끊어주겠다고 오신 것입니다. 영원히 생사가 없는 자재를 성취시켜 주고자 오셨습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그런 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사 가운데 왕이십니다. 생사가 없는 생사병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네 번째는 설법 대상이 어떤 특수한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기에 상·중·하를 묻지 않습니다. 일체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이 탁발을 가시더라도 부잣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고루 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함께 자비보시를 길러야 하고 생사가 없는 이 법에 인연을 심어야 합니다.

법문을 받아들이는 자세

다섯 번째, 부처님의 법문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몇 가지를 정리해 볼까 합니다.
첫째, 탐욕심을 비롯한 삼독심을 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 삿되고 그릇된 소견들도 비워야 합니다. 교만심, 불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묵은 생각을 버리고, 낡은 생각을 버리고, 그릇된 선입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데 그릇된 소견들, 그 낡은 견해가 방해 요인입니다. 우리들은 이 법을 배워서 스스로 닦고 세상도 밝히고 남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믿고 환희한 사람만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향해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이나,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이나, 권세 있는 사람이나, 즐거움에 빠져 있는 사람이나 모두가 똑같이 생사바다 가운데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보셨고 어둠의 세간 속에 살고 있다고 보셨습니다.
부처님은 어둠의 세계에 법을 설하셨고, 그 유법을 이어받아서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법을 이어받아서 행하고 닦고 이 세간에 널리 펴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