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징검다리

2007-10-04     관리자

미국의 수도 워싱턴 근교(近郊)에서 정토회 신도 모임 주최로 법회가 열렸다. 2003년 3월 4일, 주중(週中)임에도 불구하고 정토회 설립자인 법륜(法輪) 스님의 법문을 들으려는 사람들로 넓은 강당은 가득 찼으며 자리가 모자라서 계속 의자를 더 내놓고 있었다. 덕현 스님의 단소 연주에 이어 청법삼배(請法三拜), 그리고 잠시 입정에 든 다음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2002년 라몬 막사이사이 평화상 수상 기념으로 미국을 순회하는 스님은 이목구비가 다 큼직하고 시원스러우며 파랗게 밀은 머리가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했다. 얼굴 가득 잔잔한 미소를 띠고, 마치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듯이 나직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하는 평범한 과제를 스님은 법회의 제목으로 제시했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것인가, 하고 스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미국에 와서 사는 교포들은 1970년대 한국에서는 날고 기는 사람들이었다. 웬만해서는 미국 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에 그들은 잘 살기 위해 미국에 왔다. 접시 닦고 청소하고 가게 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여 돈 벌고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학교 갔다 돌아오며 자랐다.
이, 삼십 년이 지나 이제 그들은 시간과 돈에 쪼들리는 고달픈 생활에서 벗어났다. 부자 동네에서 큰집을 사고 고급 자동차를 굴리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몇 사람이 행복한가.
법륜 스님은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어느 보살이 스님을 점심에 초대 해서 식당에 갔는데 이 보살의 시선이 자꾸 식당 입구로 가는 것이었다. 얘기 도중에도, 음식을 먹으면서도, 계속 입구를 흘끔거리기에 스님은 드디어, 누가 또 옵니까, 하고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문 쪽을 보느냐고 하니까 보살은 그제서야, 값비싼 모피 외투를 식당 입구에 걸어놨는데 혹시 누가 가져갈까봐 걱정스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눈이 자꾸 그 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불자는 단독주택에서 살기를 소원하던 중 드디어 집을 사 가지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후로 절에 나오지를 않기에, 집 치우고 정리하느라 바빠서 그러려니 하고 몇 달을 기다렸다가 전화를 걸어 요새는 왜 볼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 불자는 망설이다가, 아파트와 달라 단독주택은 비워두고 나갈 수가 없어서라는 대답이었다.
가치의 전도(顚倒),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보살이 비싼 외투를 입은 것이 아니라 비싼 외투가 보살을 옷걸이로 만들었고, 집을 사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집이 주인을 집 지키는 개의 신세로 만들어버린 가치의 뒤바뀜이 일어난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소유한 물건들이 오히려 우리의 소유주가 되고, 우리는 어느새 그 노예가 되어 자유를 속박 당하고 사는 것이다. 돈만 많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돈을 벌고 나니 그게 아니므로 우리는 당황하고 불안하다.
절에 달려가서 불공을 드리고, 그게 별 효과가 없다 싶으면 교회에 나가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것도 별 효과가 없으면 점쟁이한테 쫓아간다. 돈으로 부처님이나 하느님의 호의를 사려고 한다. 매달 불공드리고 보시도 많이 했으니까, 매달 교회에 월정헌금 내고 교회건축비도 남보다 많이 냈으니까, 부처님과 하느님이 열 배, 스무 배로 갚아주기를 바란다.
그러한 보상심리를 부추기는 것은 또한 승려와 목사이며, 사회에서 논란되고 있는 부정부패가 오히려 종교계에서는 조장되고 용납되고 있는 현실이다.
부처님 생전의 모습을 법륜 스님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붓다 고타마는 왕의 권세와 영화조차 궁극적인 행복을 줄 수 없음을 알고 구도의 길을 찾아 왕궁을 떠났다. 그는 언제나 낡은 옷을 입고, 매일 구걸하여 잡수셨으며, 나무 그늘이나 숲 속에서 잠을 잤다. 스스로 지도자로 나서지 않고 스님들에 의해 승가(僧伽)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도록 이끌었으며, 형식과 법문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 데바달다 (Tevadatta)가 형의 위세를 시기하여, 수도승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조항이 승가에서 철저하게 준수되지 않음을 대중 앞에서 지적하고 나섰을 때, 부처님은 데바달다의 속셈을 알면서도 그의 깊은 수행심을 우선 칭찬하고 나서 이와 같이 말했다.
“수도승이면 마땅히 분소의(糞掃衣)를 입어야 하나 분소의가 없거나 다 헤어져서 더 기워입기 어려울 때에는 새 옷을 입을 수 있으며, 걸식함이 마땅하나 몸이 아픈 사람은 공양을 받아도 좋고, 하루 한 끼 먹는 것이 마땅하나 몸이 자라나는 어린 중들은 하루 두 끼 먹어도 무방하다. 물고기가 든 음식을 먹지 않는 것 또한 마땅하나 신도들이 주는 음식을 분별없이 받아먹는 것이 옳은 일이니, 음식을 가림으로써 신도들의 공양을 어렵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나무 밑, 동굴 속에서 잠자는 것이 마땅하나 비가 오면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것 또한 지혜로운 처사이다.”
불교를 틀에 박힌 종교로서가 아니라 단순하고 투명한 생활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기를 법륜 스님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정토회의 북한 돕기 운동과 환경정화를 위한 쓰레기 제로 운동은 북한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데 남한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귀한 음식이 쓰레기로 나가는 부조리한 현실을 방관할 수 없으므로 시작된 것이다.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한 노력은 부처님의 자비를 본받으려는 불법의 실천이다. 사물의 한 면만을 보는 사람들에게 스님의 광범위한 활동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된다.
스님은 가족도 없으니까 자기 한 몸 살다가 가면 그만인데 미래의 지구환경문제는 왜 들고 일어나며, 난민을 도와주고 북한에 쌀 대어주는 걸 보면 혹시 친북인사는 아닌지 헷갈린다.
그러나 사물의 양면을 보는 스님에게는 그런 헷갈림이 없으며, 북한 돕기 운동이나 환경 정화 문제는 그의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현세뿐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다 돌려주려는 회향인 것이다.
스님은 참가 대중에게 책망의 일침을 놓는 것 또한 빠트리지 않는다. 부부간의 갈등이나 자녀들의 탈선 문제를 들고 스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삼십 년 결혼 생활을 한 부부라면 결혼에는 일류 전문가요, 자식을 둘, 셋 길렀으면 자녀교육에도 일류 전문가인데,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길러본 경험도 없는 스님에게 물어볼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책망이다. 자기 삶에 스스로 충실하고 철저하고 진지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법문이 두 시간 가까이 계속되자 마이크도 힘이 드는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를 좀 크게 해달라고 대중이 부탁했으나 스님은 변함없이 나직한 음성과 미소 띤 모습으로 법회를 끝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