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저승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2007-10-04     관리자

초등학교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중학교에 가서는 중학교 선생님, 고등학교에 가서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대학교를 다닐 때는 대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심리학 개론 강의를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승가대학에서 학인스님들에게 영어를 강의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 때는 또다시 대학생들보다는 인생의 참 뜻을 알고 있어 보이는 스님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좋아 보였다. 물론 강사스님이 되고자 했던 것이 출가의 직접적 동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교수가 되고자 했던 꿈을 버리는 이유로는 충분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한 사람씩 장래희망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국회의원이나 장관쯤 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차례를 기다리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던 나는 어쩐지 선생님이든 장관이든 그것이 장래의 희망이 되기에는 뭔가 불안한 요소가 느껴졌던 것 같다.
선생님이 되는 것은 직업이지 꿈으로 느껴지지는 않았고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접 만나 본 적도 없는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는 것 또한 막연하게 느껴졌었다. 내 차례가 되어 학생들 앞에 선 나는 “나는 나의 바깥에 어떤 재산도 쌓지 않고 내가 직접 보고 듣고 실제로 체험하는 일에 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지위에도 의지하지 않고 무조건 내가 직접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잔뜩 기대했던 선생님과 학생들은 뜻밖이라 잠시 교실 안 분위기가 어색해졌던 기억이 난다.
일전에는 문득 한때 베스트 셀러였던 『여보게 저승갈 때 무얼 가지고 가나』 라는 책 제목이 생각났다. 그런데 저승갈 때 무엇을 가져가는지 그 대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답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죽으면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는지? 흔히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 했다. 물질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우리가 저승길에 가져갈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다. 그건 체험이다.
체험을 통한 의식의 진화다. 다시 말해서 진화된 의식을 가지고 간다. 밀린다 왕문경에 보면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스님에게 불교에서는 ‘나’가 없다고 하는데(無我), 그럼 윤회하는 것은 ‘나’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가세나 스님은 습관적 에너지(習氣)라고 대답한다. 습관적 에너지는 정신적 신체적 체험의 산물이고 응축물이다. 그러니까 결국 윤회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하는 체험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나와 체험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흔히 체험하는 주체가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나’를 체험보다 우위에 두고 나를 능동적 주체로 생각하고 체험을 수동적으로 생각한다. 체험을 ‘나’의 종속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체험을 선택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한편의 드라마나 연극이라고 생각해 보자. 연기자가 자신의 역을 제대로 소화하고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자 노력하듯이 우리들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연기자가 상을 받듯이 우리들 또한 순간순간 펼쳐지는 인생 드라마에서 보다 다양한 체험과 함께 성장할 것이다. 나아가서 훌륭한 연기자는 자신의 배역을 골라 잡듯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던 우리들 역시 자신의 모습을 가꾸어가고 선택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나’라고 하는 존재의식은 순간순간으로 일어나는 삶의 체험 속에서 드러날 뿐, 체험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없다. 체험이 나의 존재의식을 가능하게 하고 체험이 나를 만든다. 나의 존재는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살아있다. 그러므로 나를 바꾸거나 성장시키는 일 또한 체험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삶의 체험은 정말로 즐겁지만은 않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화나고 괴로운 체험들을 하게 된다. 특히 상대방의 실수나 무책임, 심지어는 의도적 행위에 의해서 내 계획이 어긋나고 시간적·경제적으로 손실이 일어났을 때 순간적 감정은 미움이고 분노이다. 손실이 크면 클수록 분노도 커지고 생각하면 할수록 감정은 더욱더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십상이다. 분노가 고통으로 변하기 전에 분노하는 감정을 잘 살펴서 하나의 인생체험으로 가져가고 나아가서 성장으로 가져가야 되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럴 때 대구 지하철 참사나 이라크 전쟁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는 일은 우리들이 현재 겪고 있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데 새로운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사지를 잃고 생명을 잃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신들이 겪고 있는 것은 너무나 작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재산이나 명예, 지위가 아니다. 저승길에 가져갈 유일한 것은 체험뿐이다. 그렇다고 미움과 분노와 고통의 느낌들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미움과 분노는 진정한 체험이 아니라 체험을 위한 동기고 자극인 것이다. 미움과 분노, 고통은 지금껏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진실된 삶의 의미를 체험하는 길의 안내자요, 탐욕이나 명예를 쫓고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려는 해독제들이다.
그러기에 분노와 고통을 집착의 해독제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삶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삶은 바로 인생의 전부를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삶일 것이다. 즐거움이든 고통이든, 원하는 것이든 원치 않는 것이든 간에 존재하는 모든 순간들을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풍요롭고 성공적인 자기 삶의 예술을 완성해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