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연 이야기] 내 삶의 미소 둘

2007-10-04     관리자


최근 『화』라는 책으로 유명한 틱낫한 스님의 법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번 방한 일정 중에 동국대학교에서 3일간의 일정으로 수련을 겸한 강연이 있었고, 첫날에는 운이 좋아 강연장의 앞쪽 자리를 잡고서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서 연단 쪽에 시선을 주었을 때 내 눈에 확 뜨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틱낫한 스님의 모습이 담긴 대형 걸개그림이었다. 내 시선을 끈 것은 틱낫한 스님의 모습이 아니라 그 아래 적힌 두 마디의 경구였다.
“I have arrived. I am home.”
나는 이미 도착했다. 나는 집에 와 있다.
화, 그리고 고향. 그 두 가지 단어가 내 머리 속을 헤집었을 때부터 틱낫한 스님의 잔잔하고 평화로운 법연이 끝날 때까지 나는 줄곧 틱낫한 스님의 미소 띤 얼굴 위에 또 하나의 얼굴을 겹쳐서 그리고 있었다. 나에게도 틱낫한 스님의 그 잔잔하고 평화로운 미소를 닮은 또 다른 미소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의 말씀으로는 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다닌 절이 대운암이었다. 고향마을 인근의 용각산 마루턱에 자리잡고 있는 대운암은 조금은 초라하고 그러면서도 고즈넉한 전형적인 한국의 산중 암자인데, 내게 있어서는 불교와 인연을 굳게 맺어주고 있는 산실 같은 곳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고등학생이란 입시라는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버둥거리는 가여운 존재일 뿐이다. 내 처지도 별 다를 것이 없어서 수험서 붙들고 씨름하기에 여념이 없기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였다. 그 정신 없던 시절의 여름방학을 보내던 곳이 대운암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의 여름방학을 그 곳에서 지냈으니,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시절 학교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 이 대운암이다. 피서를 겸하면서 공부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곳이었다. 방학이면 절에 모여드는 고만고만한 또래들이 있었고, 보충수업은 물론 대구의 푹푹 찌는 여름 무더위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또 대운암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묘미가 하나 있었다. 여름날 이른 새벽부터 피어 오른 물안개가 해가 떠오를 즈음이 되면 절 앞마당의 바로 아래까지 차올라서 운해(雲海)를 방불케 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라도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어지니 게으름을 몰아내는 데도 금상첨화였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내가 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내가 절에 열심히 드나들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늘 법당 한 쪽에 달린 조그만 방에 앉아서 꼿꼿한 자세로 나를 맞이해 주시던 스님 때문이었다. 설송 스님….
경북 청도의 외진 산골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서 10여 년을 주석하셨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불교에 이르는 인연의 씨줄을 엮어주셨던 분이 설송 스님이셨다. 고향 인근에서는 불가사의로도 알려졌던 분이다. 그 분께서 주석하셨던 10여 년 동안 스님을 한 번이라도 뵌 적이 있는 사람 치고 어느 누구도 스님의 미소짓지 않은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기에 신도들 사이에 불가사의하다고 회자되었던 것이다. 좀 과장되이 말한다면 미소짓지 않은 모습의 스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얘기들은 스님께서 입적하신 뒤에 더 심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0여 년을 한결같이 스님을 모셨던 공양주 보살님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조금도 차별없이 미소로만 대하셨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미소짓는 모습만의 스님을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다. 여러 번 꾸중을 들었고, 입적하실 무렵 병원에 입원해 계실 적에는 종종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도 뵈었던 까닭이다.
스님께서 입원하신 병원은 내 셋째 누님이 근무하고 있던 종합병원이었다. 스님의 병환이 내과에서 치료해야 될 병이었기 때문에 마침 누님이 근무하던 내과병동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덕분에 병원 인근에서 누님과 함께 자취하던 동생과 나는 종종 입원실로 스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수행하시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도 병원에 입원해 계실 무렵이었다. 갑작스레 냉면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고, 어찌어찌 해서 병원 인근의 식당에서 냉면을 시켜 드시고 난 뒤에 빈 그릇을 한참 바라보시다가 들려주신 이야기였다.
경주 인근의 어느 사찰 근처에 있는 계곡에서 참선을 하고 계셨는데 그 날 따라 자꾸만 수마가 달려들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는데, 계곡 물 속에 헤엄치고 있는 큰 잉어가 한 마리 눈에 띄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 놈을 바라보는데 한참을 헤엄치던 잉어가 풀쩍 뛰어올라서는 스님 앞에 놓여 있는 바루 그릇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른 잡을 생각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는데, 잉어는 제 큰 몸뚱이 통째로 바루 그릇 속에 들어가려고 뛰어들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잉어가 왜 바루 그릇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간 데 없고, 그저 가엾기만 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저 놈의 미물이 무지해서 제 몸뚱이 큰 것은 모르고 조그만 바루 그릇 속에 들어가려는 것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한참을 바위 위에서 뛰다가 축 처져서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잉어를 보고는 물 속에 놓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는 잉어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꿈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대로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하, 이게 내 그릇의 크기로구나. 내가 너무 큰 것을 바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스님은 ‘도’니 무엇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그저 자족하며 하루하루 사는 것도 즐거워하시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두어 달 후에 스님은 입적하셨다. 입적하신 후에 셋째 누님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고.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을 이겨내시는데, 차츰 다른 사람에게 별달리 내색을 하시지 않으셨다고. 퇴원하실 무렵에는 깜박 깜박 환자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늘 미소짓는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늘 미소짓는 모습의 스님. 아직도 눈만 감으면 생생히 그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제 내 앞에는 그 분이 계시지 않는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2년 후에 나도 불교를 배우고자 진로를 수정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불교를 배우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조금 넘는다.
이제 다시금 화내지 않는 얼굴, 또 하나의 미소를 보았다. 틱낫한 스님이 플럼빌리지의 표석에 새겨 넣은 두 마디의 경구는 스스로 자족함에 이르렀다는 것일까? 그래서 작은 나 자신에게도 만족할 줄 아는 ‘나’를 찾았다는 의미일까? 이제 왜 스님께서 늘 미소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그 분을 닮은 미소를 내 얼굴에 새겨 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