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이 대화의 원칙이다

함께 사는 세상 이렇게 일굽시다

2007-10-04     관리자

현대 한국 사회의 키워드 중의 하나는 ‘갈등’이다. 갈등이란 칡덩굴이 얽혀 있는 것과 같이 ‘서로 상치되는 견해·처지·이해 등의 차이로 생기는 충돌’을 말한다.
해방 이후의 좌우 갈등과 그 후 이어지는 남북 갈등, 그리고 70년대의 경제 개발로 생겨난 계층간의 갈등과 장기 집권으로 인한 지역 갈등, 그리고 최근에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남남 갈등에 더하여 세대간의 갈등과 성별간의 갈등 등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느 하나도 줄거나 없어지기는커녕 증폭되고 날이 갈수록 그 갈등의 종류만 늘고 있다. 새로운 정부마다 개혁을 외치지만 그 개혁은 항상 또 다른 갈등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
갈등은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한다. 대화를 통한 대 타협 혹은 대승적 견지에서의 대 화합이 갈등 해결의 관건이라고 외치지만 항상 미봉책에 그칠 뿐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적은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대화의 본질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화를 외치는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화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목적이다. 설득과 타협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일종의 파워 게임일 뿐이며, 그렇게 얻어진 타협은 힘의 균형에 의한 일시적 조정일 뿐이다.
진정한 대화는 그 자체 목적일 뿐으로 굳이 다른 목적이 있다면 대화를 통한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다. 화합과 갈등의 해소는 이해의 부산물일 뿐이다.
대화가 파워 게임이라는 것은 얼마 전 있었던 대통령과 평검사와의 토론에서도 잘 드러났다. “대통령인 내가 이렇게 권위를 포기하고 이 자리에 왔는데 이렇게 막 가자는 거냐”는 식의 유치한 반응은 이미 대화가 아닌 파워게임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최근 미국에서 나온 성희롱에 관한 사례별 판례를 보면 직장 상사가 여자 부하직원에게 저녁 같이 먹자고 하는 친절한(?) ‘제안’도 맥락에 따라 ‘폭력’일 수 있다고 한다. 진정한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대화의 필요 충분 조건이란 무엇인가?
대화의 어려움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종교간의 대화’이다. 신념체계의 상이함은 물론이고 때로는 상대를 인정하면 내가 부정되는 모순관계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경우가 바로 종교간의 대화이다. 잘 알려진 종교간의 대화의 몇몇 유형을 통해 대화의 어려움과 진정한 대화의 필요 충분 조건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우선 배타주의(Exclusivism)적 태도이다. 이 태도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태도이다.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나 전통은 미신 내지는 악마의 가르침으로 여기는 한국의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태도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한 극단적 예이기는 하지만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태도의 유형을 많이 접하고 있다.
해방 이후의 좌우 대결의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개혁을 외치는 많은 경우 또한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로 임하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결국 상대를 설복시키고 제압하겠다는 파워게임일 뿐이다.
둘째로 포괄주의(Inclusivism)적 태도가 있다. 이 태도는 ‘네가 주장하는 것은 이미 내 주장에 다 포함되어 있다’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얼핏 보아 상대방의 입장을 일부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양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일방적 입장이다. 종교간의 대화에서 일부 불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에 이런 경우를 많이 본다. 즉 “예수 말씀이 다 좋다. 그런데 그 정도는 우리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다 들어 있다”라는 것이다.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 신앙은 하근기의 신앙이라는 입장에서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태도로 이것 또한 진정한 대화의 자세라 할 수 없다.
셋째로, 보편주의적 입장이 있다. 이 태도는 60년대의 보편주의 윤리학의 방법론적 기초가 된 것으로 양자의 차이점을 초월한 제3의 보편적 입장을 세울 수 있다는 입장이다.
앞의 두 가지 유형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이것은 양자간의 차이를 사상(捨象)한 것일 뿐 갈등의 현실적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마치 에스페란토 어와 같은 것이다. 에스페란토 어는 세계 각종의 언어에 내재하는 공통점을 추출하여 배우기 쉽고 간편하게 만든 인공 언어였다. 그 이상(理想)과 취지는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도 쓰지 않는 언어가 되고 만 것이다. 보편주의적 입장에서의 종교간의 대화란 것이 가지는 한계도 바로 이러한 것이다.
넷째로, 다원주의(Pluralism)적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나와 다른 입장과 이해의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종교학자들이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상이한 입장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다원주의를 잘못 이해하면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무관심, 혹은 모든 것을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입장과의 공존은 가능하지만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한 경우가 그것이다.
공존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대화가 없는 무관심을 바탕으로 한 공존은 일시적 미봉책일 뿐 갈등의 궁극적 해결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원적 입장이란 대화의 진정한 대화의 필요 조건일 뿐 충분 조건은 아니다.
진정한 대화의 충분 조건은 바로 상생(相生)의 입장이다. 상생은 단순히 다른 처지와 이해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다른 존재가 곧 나라는 존재의 바탕이 된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더불어 살 뿐 아니라 더불어 살게 해주는 것이 상생이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고, 너를 살려야 나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상생의 정신이다. 여기에는 설복할 대상도 제압할 대상도 없다.
상생은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기본 원리이다. 이것은 곧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은 단지 고통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인과의 법칙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존재의 실상이 곧 연기적 존재이며, 이를 깨닫는 것이 곧 상생의 정신이다.
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상생의 정신은 곧 대화에 있어 내 입장과 관점의 한계를 깨닫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