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가 깃든 산사 기행] 충남 연기군 운주산 비암사

비암사 석불비상에 어린 백제의 꿈

2007-10-04     관리자

봄바람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꽃샘 추위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파릇한 새싹이 한층 보드라워진 흙을 밀어 올리고 꽃 봉우리가 봉긋 솟아올랐다. 이른 아침 잠을 깬 새들이 문 밖에 모여 앉아 지저귀고 가벼운 바람에 실린 꽃향기가 세상 한쪽을 수놓고 있다.

콘크리트,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를 빠져 나오면서 사막 도시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어이없는 현실을 전파를 통해 전해듣자니 화사한 이 땅의 봄이 한편으로 송구스럽기까지하다.

부지런히 봄을 준비해야 할 터인데 어느 땅에서 벌어지고 있을 몹쓸 간난에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자식 낳고 뭇 생명 있는 것들 옮겨 거두어 보니 그 짠한 마음이 이 봄 유난히 새삼스럽다.

“비암사 부처님이시여! 귀기울여 주시옵소서.” 천안 나들목을 벗어나 공주 방면으로 달리던 차가 어느새 광덕과 조치원 갈림길을 만난다. 광덕길은 차령고개(터널)를 넘어 공주로 나아가고 조치원길은 다시 크고 작은 길을 만나 제각각 공주와 대전이라는 이름난 도시를 향한다. 이 크고 작은 길이 바로 금북정맥이 부려놓은 산과 강을 따라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길이니 오늘 우리의 목적지인 운주산(雲住山) 비암사(碑岩寺, 041-863-0230) 또한 이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

운주산 비암사는 그 이름 때문인 듯 한때 ‘뱀절’이라고도 불렀던 모양이다. 『전의면지』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비암사에 비구니 스님들이 머물 때였다. 어느 날 저녁 젊은 청년이 찾아오더니 절 곳곳을 둘러보고는 탑을 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깊은 산중이기에 어스름녘에 와서는 오래도록 탑을 돌다 아침이면 사라지는 낯선 청년의 모습이 스님들로서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과 음식을 건네며 그 사연을 물어보아도 빙그레 웃기만 하는 청년. 더욱 궁금해진 스님은 드디어 탑돌이를 끝낸 청년의 뒤를 몰래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청년은 마을이 아닌 절 뒤의 산으로 오르더니 바위 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에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본 스님은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커다란 구렁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모르게 백일 동안 절에서 탑돌이를 하면 사람이 되는 소원을 이룰 수 있었는데 그만 하루를 남겨두고 스님에게 발각되어 소원을 영영 이룰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괜한 호기심에 구렁이의 환생을 막게 된 스님은 그날부터 자신 때문에 사람이 되지 못한 구렁이를 돌보며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비암사 동쪽 산 정상에는 바위 굴이 있다 하니 옛 전설이 더욱 신비하게 들려온다.

4월 15일 경 찾아 뵙겠다고 전화로 먼저 연락을 드렸더니 비암사 주지 태관 스님의 웃음 소리와 함께 흔쾌한 허락이 떨어졌다. 필요한 자료 때문에 연기 군청에 문의하니 마침 비암사에서 그날 역대 백제 대왕의 제례행사가 있다는 소식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지스님이 지었던 나지막한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비암사가 있는 전의면 다방리 마을 가까이에 도착하자 행사를 위해 배치된 경찰들이 차의 진행 방향을 안내한다.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데 풍물 소리와 함께 백제 군사 행렬과 마주친다. 그 뒤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뒤따르고 있다. 비암사 ‘백제대제(百濟大祭)’가 시작된 것이다.

그 행렬을 뒤따라 높다란 계단을 올라 절마당에 들어서니 제법 넓은 터에 둘러진 야트막한 담장이 인상적이다. 그 한쪽 곁에 850년이 더 된 느티나무가 비암사를 지키고 있고 대웅전 앞으로 특별한 때에만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괘불 속 준수한 용모의 부처님이 따뜻한 봄햇살을 받으며 앉아 계신다. 그 아래 차려진 제단 주위로 행사를 시작하기 위한 발걸음들이 분주하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의 유민들은 웅진성 북쪽 이곳 전의에 비암사를 짓고 석불비상을 만들어 모시고는 백제의 역대 왕과 대신, 그리고 부흥운동을 하다 죽은 이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4월 15일 제를 지내왔으니 이것이 백제대제의 옛모습이라고 한다.

이는 비암사에서 발견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碑像, 국보 106호)’등 3기의 불비상(佛碑像)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명문 내용에 의해 밝혀진 것.

“전(全) 씨들이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상과 관음, 대세지 보살상을 삼가 조성한다. …계유년 4월 15일에 내말(乃末) 전씨, 달솔(達率) 진차(眞次, 身次), 진무(眞武) 대사(大舍)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과 7세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

지난 1960년 황수영 박사에 의해 발견된 이 비상은 그 조성 연대와 경위, 발원자 및 불보살의 이름을 밝히고 있어 그 의미가 상당하다. 『연기지』(1966)와 『연기군지』(1976)에는 비암사 창건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를 모아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년, 신라 혁거세 1년)이라 밝히고 있고 일설에는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도 전하지만 정확한 개창기록이 없기에 그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 비상에서 드러난 ‘계유년’, ‘혜명 법사(惠明法師)’ 등의 글자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그 조성 시기를 백제 멸망 후인 673년 경으로 볼 수 있어 적어도 이 때쯤에는 비암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백제 멸망 직후 조성된 이들 석비상은 통일신라 초기의 백제 석조미술을 오늘에 보여주는 것이어서 당시의 불교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이윽고 모형 불비상이 괘불 아래 놓여진 제단 위에 모셔지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으로부터 32대 풍왕까지 역대 왕들의 깃발이 줄지어 선다. 범종 소리에 이어 범패의식에 나선 스님의 두 손에 들린 바라가 허공을 가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금북정맥이 차령을 넘어 서해바다로 나아가기 직전 남으로 뻗어 내린 한 산줄기가 조천, 미호천으로 금강 줄기에 물을 보태고는 운주산에 다다른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는 운주산 너머로 이곳의 절 이름을 그대로 쓴 ‘비암치(碑岩峙)’라는 고개가 있어 흥미롭다. 전의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 백제의 고도 공주로 또는 천안이나 목천으로 발걸음을 내딛던 백성들의 마음속에 ‘비암(사) 고개’는 천여 년 동안 잊혀지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일까.

연기 지역은 증산(甑山)산성, 운주산(雲住山) 남북산성, 고산(高山)산성 등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백제의 유민들이 몰려들어 활화산 같은 백제부흥의 불꽃을 피워올렸던 곳이다. 그만큼 격전지로써 흘린 피도 많았을 터. 끝내 백제 왕실을 되살리지 못하고 울분 속에 주저앉은 곳에서 백제의 유민들은 그들의 마음을 다독여줄 이를 찾았던가 보다.

비암사에 아미타삼존상을 새겨 놓고 백제 부흥운동 중에 사라져간 뭇 생명들이며 자신의 일가친척과 선조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의자왕과 풍왕, 복신 등 국왕대신들의 극락왕생도 아울러 기원하였으리라. 그리고 자자손손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비암사와 그 고개를 넘나들며 찬란한 백제문화를 꽃피우고자 했던 그들의 꿈을 끝끝내 잊지 않았으리라.

그런 굳건한 인식이 천년 뒤에나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에 남아 ‘비암사 고개’에서 되새기던 비장한 각오를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화창한 봄날 웅웅거리는 절마당을 지나 극락보전 아미타 부처님을 참배한다. 찾아오는 이 모두의 마음을 위로해주셨을 후덕한 얼굴이시다. 이 땅에서 태어나 사라져간 모든 이들의 극락왕생을, 백제의 찬란한 문화가 이 땅 어디에서든 꽃피어나길 비암사 부처님께 간절히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