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이 만난 사람] 다정 김규현 화백

황금물고기를 화두 삼아

2007-10-04     관리자

강원도 홍천 ‘어린 물고기 달빛과 어울려 노는 물가의 집’ 수리재(水理齋)에 살고 있는 다정(茶汀) 김규현 거사와의 만남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많이 달라져 다리도 만들어지고 옆으로 도로도 생기고 있지만 홍천 강변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했던 마곡리. 3명의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폐교가 된 분교 옆 강 가 그가 직접 지은 초가집에는 그의 부인과 아들 예슬이가 함께 살고 있었다.

손수 흙벽돌을 만들어 지었던 2층 초가집이 홍천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떠내려가버리고, 또 다시 지은 집이 1997년 화재로 타버린 후에는 집에 대한 욕심은 없어졌다고. 그저 비가 새지 않으면 그뿐이라지만 돌로 지어진 그의 집 모양새도 그러하려니와 예술가로서 그의 삶이 예사롭지 않아서인지 춘천과 강촌을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 되고 있다.

불광과는 오랜 인연지기인데도 다정 거사는 어떤 분인가 하고 물어올 때면 한 마디로 말하기가 어렵다.

수인목판화가, 다인(茶人), 글 쓰는 사람, 홍천 강변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 사진 찍는 솜씨 또한 보통이 아니니 사진가, 10년 넘게 티베트를 오가며 연구해온 티베트 전문가, 이 세상에는 짝할 이가 없는 듯 깊은 눈길은 언제나 저 먼 곳 어딘가를 향하고 있으니 구도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수년 동안 부처님 장삼을 덮고 잠들어 본 적도 있고 수년 동안 홍천강(洪川江) 허리를 베고 잠들어 본 적도 있다. 한마디로 다정 거사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인물이다.

그는 왕터산 자락에서 단소를 불고 있으면 신선이 되고, 홍청강 자락에서 감자를 심고 있으면 농부가 되는 변신술을 가지고 있다. 다재다능하고 박학다식해서 어떤 분야에서도 걸림이 없다.
특히 그는 예술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성현을 사랑하고 서민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진 인물이다.”라고 다정 거사의 절친한 친구 이외수 선생은 말한다.

중국 북경 중앙미술대학에서 수인판화를 공부하던 그가 티베트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한 달간 돈황의 현장 사생을 통해서였다. 이후 인연이 있어 티베트대학에 1년간 만다라와 탕가를 연구하면서 티베트는 물론이려니와 인도와 중국 일본의 자료들을 통해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공부하면서 우리 민족의 뿌리가 티베트와 연결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에 놀랐다.

색동저고리, 미숫가루, 사닥다리, 육포, 순대, 사물놀이, 탱화, 푸닥거리, 딴따라(탄트라) 등등 수만리 수천리 시공이 다른데 왜 이리 같은가.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조만간 출판될 『티베트의 문화산책』편에 소개될 예정이다.

“티베트의 개국신화를 보면 티베트인은 원숭이의 후예였고, 소설에 나오는 손오공의 후예인 셈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의 무대가 티베트(당시는 지금의 20배의 넓이의 땅이었음)였으며, 손오공이 쓰던 술법을 지금도 티베트 스님들이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원숭이였다는 이야기하며, 히말라야가 원래는 바다 속이었다는 이야기 등등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어온 초과학적인 전설이 현대과학으로 입증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8세기 동굴벽화에도 진화의 과정은 그대로 생생하게 그림으로 남아 있어요. 티베트라는 나라는 알면 알수록 놀라운 나라지요.”
불광지에 연재되고 있는 ‘신왕오천축국전 별곡’에도 자신을 ‘해동의 나그네’라고 칭하듯 그의 삶은 되짚어보면 한마디로 낭인의 삶 그것이었다.

대학 산악부원이었던 그가 처음 찾아간 것이 설악산 백담사 산장. 그 곳에서 한 때는 선승이었던 백담사 산장주인 윤두선 씨를 만나게 되고, 백담사 예불소리를 들으며 그윽한 영혼의 울림소리에 이끌려 절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윤두선 씨의 다락방에 있던 일본말로 된 경전들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한 것도 그 때다.

이끌리듯 내친 김에 해인사로 출가를 했고, 강원에서 치문이며 사교를 공부했다. 강원개혁운동을 주도한 죄로 강원에서 내쫓기는 바람에 만행 중 다솔사 효당 스님을 만나 차공부를 하고, 광주에서 의재 선생을 만나 사군자를 공부했다. 다정이라고 하는 호는 그 때 지어진 것이다.

효당 스님이 다(茶)자를 주시고 의재 선생이 정(汀)자를 주셨다. 그림을 공부하고 차를 공부하고 단소, 주역과 한문공부를 하며 스승을 찾아다닌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런데 출가자로서의 길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4년간의 출가, 만행생활로 만신창이가 되어 6개월간 입원하면서 부모님의 간곡한 뜻에 따라 환속을 하게 되고 인사동에 화실을 내게 되었다. ‘죽림다회’를 열고 차담을 나누며 이조실록 등을 뒤져 차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유신정권 말기 인사동의 다정 거사 화실은 문인, 묵객, 반체제 인사들의 집합소나 다름이 없었다.

그림쟁이로, 다인으로 꽤나 유명세를 타며 많은 제자들도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1979년 제자들과 답사겸 들른 홍천강변이 하도 좋아 그 곳에 살기로 작정하고, ‘공간사랑’에서 고별전을 마지막으로 서울을 떠났다. 손수 흙벽돌을 만들어 2층 초가집을 짓고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물고기를 그려넣었다. 그런데 1984년 홍천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다 쓸려가 버리고 말았다. 벽돌에 그려넣은 1080마리의 물고기를 홍천강에 방생한 셈이다.
잠시 안주하는가 싶더니 그의 낭인으로서의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1년간 전국의 섬만을 떠돌았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오징어배를 한 달 동안 타게 되었고, 홋카이도 근처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뒤집혔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지루한 세상 잘 됐다’싶어 아예 살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작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다 죽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 때 만난 것이 예슬이 엄마였다. 학보사 기자이면서 중앙일보 르뽀기자로 활동하던 중 다정 거사를 취재하기 위해 울릉도까지 온 것이 인연이 되었다.

40kg의 몸무게에 찌들어 폐인이 되다시피한 다정 거사를 살린 것은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예슬이 엄마다. 생명의 은인이며 관세음보살이 따로 없다고 다정 거사는 늘 말한다.

그 때 이후 거의 수리재에 은거하다시피 그림을 그리며 농사를 짓고, 티베트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해오다가 출판활동과 강의 등 바깥 활동을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97년 수리재에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홈페이지(http://www.tibetsociety.co.kr)를 열어놓고 보니 책을 보고, 혹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고 찾아오는 이들이 차츰 많아졌다. 1년에 한 두 번은 수리제에 모여 구하기 힘든 티베트 비디오도 보고, 슬라이드를 보면서 다정 거사의 강의도 듣는 등 그야말로 지인들이 함께 모여 푸닥거리(?)가 열리기도 한다.

“그림쟁이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중도 속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지만 골고루 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음 생에는 아무런 재주 없이 티베트에 태어나 수행만 열심히 해보고 싶습니다.”
총 10권으로 기획된 티베트 관련 책 집필을 마치게 되면 다시 그림쟁이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고, ‘황금물고기’를 화두삼아 수행하며 노인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황금물고기’는 그의 평생 화두이기도 하다. 물고기가 늘 깨어서 정진하는 수도자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티베트의 전설에 보면 물고기는 꼬리를 치며 윤회의 바다를 솟구치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물고기가 정충의 모양을 하고 있는 생명인자를 뜻하기도 하기에 그의 평생 화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엔 언제나 낙관처럼 물고기가 한두 마리 이상은 항상 노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