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26.‘오장국’이었던 스와트계곡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26

2007-10-04     김규현

천불천탑(千佛千塔)의 골짜기

간다라국의 수도였던 페샤와르에서 인더스 강의 지류를 따라 북쪽으로 길게 뻗어 올라간 드넓은 곳이 스와트(Swat) 계곡인데, 이 곳이 바로 우디아나(Uddiyana) 즉 한역된 ‘오장국’이다.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파밀 고원을 넘으면 타클라마칸 사막이 나타나고, 그 곳을 횡단하면 중원의 장안으로 연결된다. 이른바 ‘실크로드’의 한 갈래길이며 또한 전통적인 ‘입축구법로(入竺求法路)’로 이용되어 온 루트이다. 이 길을 따라 법현, 송운, 현장을 비롯한 수많은 구법승들이 뜨거운 구도심만으로 행장을 꾸려 목숨을 담보로 걸고 천축을 드나들었다. 물론 그 중에 우리의 혜초도 포함되어 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또 이 곳 간다라국에서 북쪽으로 산으로 들어가 3일을 가면 오장국(烏長國)에 도착한다. 그 곳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우디야나(鬱地引那)’라고 한다. 이 나라의 왕은 삼보를 크게 공경하고 백성들은 많은 몫을 절에 시주하고 작은 몫을 자기 집에 남겨 두어 의식으로 사용한다. 재를 올리고 공양하는 것은 매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아서 승려들이 속인보다 조금 많다. 오로지 대승만이 행해진다. 의복과 음식과 풍속은 간다라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다르다.”

혜초가 3일 동안 걸어 간 그 길을 따라, 이제 ‘해동의 나그네’도 길 가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유서 깊은 고적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때는 정월이라지만 남쪽 나라여서인지 이름 모를 야생화가 봉우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의 전문 중에서 위 구절처럼 이렇게 한 나라 전체의 불심을 찬양한 예가 없는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되듯이, 현장 법사도 1천 4백여 가람과 1만 8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구법승들의 왕래가 활발하였을 당시 이 오장국은 승려가 속인보다 많았고 절과 탑이 연이어 이어졌을 정도로 글자 그대로 ‘불국토’였다.
당시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이 곳만은 비록 전성기는 아니지만, 찬란했던 대승의 정수인 우담바라 꽃이 아직은 시들지 않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천여 년 뒤,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증명하듯 현재의 스와트는 목탁소리 대신 온통 이슬람 사원에서 들려오는 ‘꾸란’ 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다만 다행스런 일은 이교도의 참혹한 파괴와 세월의 풍상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의 유적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그네의 발길은 페샤와르를 떠나 먼저 탁티바히(Takhti Bahi) 사원으로 오르는 산 길 아래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평지에 세워진 사원만 보아왔던 나그네의 눈에는 비록 헐벗은 산이지만 산 중턱에 웅장하게 솟아 있는 사원이 정답게 느껴졌다. 급경사의 길을 한참을 올라 마침내 절 경내에 들어서자 탄성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마치 그리스의 고대도시 같은 웅장한 규모도 그렇거니와 스투파, 불상, 법당, 승방 등 상당 부분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고색창연한 사원은 기원 전후 쿠샨 왕조 시대에 건립되어, 당시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인더스 강 나루터 훈드(Hund)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던 지리적 이점 때문에 7세기까지 번영하며 간다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대승불교의 거점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다가 훈족에 이어 이슬람의 침공으로 역사 속으로 묻혀지게 되었지만, 영국 식민지 시절에 몇 사람의 원력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다시 평원을 내려다보고 서있다.

자타카(Jataka)의 고향, 밍고라(Mingora)

도중에 잘 보존된 아쇼카 비문석(Ashokan Inscriptions)과 역시 원형 상태로 남아 있는 쿠산 시대의 싱게다르(Shingedar) 스투파를 둘러보고, 다시 길가에 서 있는 갈리가이(Ghaligai) 마애불상을 참배하였다. 저녁 늦게서야 옛 오장국의 도읍이었던 몽게리 성 즉 현재의 밍고라 마을에 도착하여 터미널 근처에 잠자리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이 몽게리 성에 대해서는 현장 법사도 “왕은 대부분 몽게리 성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데 성은 주위 16리이고 주민은 번영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마을의 중심은 이웃 마을인 사이두사리프(SaiduSharif)라는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간다라의 또 다른 보고인 스와트 박물관도 그 곳에 있었기에 오전 내내 그것들을 훑어보고 오후에는 길을 나섰다. 이 곳의 유적들은 대개 여래의 전생설화인 ‘자타카(Jataka)’에 연결되어 있어서 매우 이채로웠다. 해동의 나그네는 스와트 계곡을 순례하면서 ‘나누는 삶’ 즉 보시(布施)를 화두로 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근처의 유적지가 온통 그것과 연결된 설화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불교의 초심자들이 남을 위해 자신의 귀중한 신체나 심지어 목숨까지 기꺼이 보시하는 것을 다반사처럼 여기는 내용의 ‘자타카’를 대할 때 정도에 따라서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겪게 마련이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에 대한 문제는 불자들 개개인의 근기(根機)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다만 보시란 행위의 상징성에서 읽을 수 있는 어떤 따뜻한 메시지로서 이해하면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이 자타카에 대해 현장 법사도 현지에 널려 있는 많은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 동쪽 4리에 탑이 있다. 영험이 아주 많은 곳인데 부처님이 옛날 인욕(忍辱) 선인이었을 때 카리 왕에게 몸을 보시했던 곳이다. (중략) 또 마유가람에서 서쪽으로 60리 가면 대탑에 이른다.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이다. 여래가 옛날 보살행을 수행하면서 시비카 왕이라 일컫고 있을 때, 불과를 얻기 위하여 여기서 몸을 찢어 매에게 주기 위해 비둘기로 변신한 곳이다.”

또한 송운도 「낙양가람기」에서, “12월 초에 오장국으로 들어갔다. 북으로는 총령에 접하고 남으로는 천축에 잇닿았다. (중략) 비라(毘羅) 태자가 자기 자식을 시주한 곳이고 살타(薩唾)가 몸을 던진 땅으로, 비록 오래된 옛 습속이지만 토속적 풍속이 잘 남아 있었다. 왕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8일을 가면 여래가 고행할 때 몸을 던져 굶주리는 호랑이를 먹였던 곳이 있었다. (중략) 산에는 승려가 3백여 명 있는 수골사(收骨寺)가 있었다. 여래가 옛날에 마휴국(摩休國)에 있으면서 피부를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부러뜨려 붓으로 삼은 곳이 있었다. 아쇼카 왕이 대탑을 만들어 그것을 보존하였다. 뼈를 부러뜨린 곳에는 골수가 돌 위에 흐른 자국이 있었다. 그 빛깔이 윤기 있게 반들거려 방금 흐른 것 같았다.”

‘자타카’는 싯다르타의 전생의 육신이었던 비스반타라(Visbantara) 태자의 아낌없는 보시행을 다룬 구비문학에 가까운 설화가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가 북인도를 중심으로 현란하게 피어나면서 더욱 만개되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낌없이 주라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는 상징성만 있을 뿐이지 그 내용 자체를 사실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실제 무대가 있을 리 없겠지만, 이 곳에는 그것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바로 그런 곳이 스와트 계곡이었다. 하루 종일 동분서주하다 보니 벌써 석양 나절이었는데 잠시 쉬려고 붓카라(Butkar a) 사원 바위에 걸터앉아 있으려니 어디에선가 전음술(轉音術)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해동의 나그네여! 목숨이나 신체는 곤란하더라도, 대신 주머니라도 좀 털어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