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불심

징검다리/ 신선한 충격

2007-10-04     관리자

한국 여행 중 해인사에 들르려고 마음먹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다}라는 책을 동네(미국 실버 스프링) 도서관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누가 저런 불경스러운 소리를 했을까? 아무리 모른다고 해도 팔만대장경이 어찌 빨래판이 될 수 있는가!
괘씸한 마음에 책을 꺼내 뒤적여봤다. 저자(전병철)는 책의 첫째 장에서 불상 이름에 대한 해설을 한다. 혀가 잘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생소한 불상의 이름들은 그것을 짓는 기본규정이 있고, 그 기본규정을 알고 나서 불상 이름을 보면, 그 불상이 어디에서 제작 혹은 발견되었으며,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떤 부처님의, 어떤 자세를(앉았거나 섰거나) 형상화했는가 하는 자세한 지식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누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본 것도 아닌데 나는 슬그머니 멋쩍어지고 책 제목만 보고 화를 낸 자신의 경솔한 판단이 부끄러웠다. 찬란한 5천년의 문화라고 우리가 툭하면 추켜세우는 우리 문화에 대해, 그리고 그 문화가 만들어낸 보물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얼만큼 알고 있는가.
지금 내 앞에 한문이 새겨진 목판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판독할 만한 지식이 있는가. 십중팔구, 빨래판치고는 좀 유식한 빨래판이구나, 하는 정도로 지나쳤을 것이다. 문화재라고 자랑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무지(無知)를 이 책의 제목은 적절한 해학을 섞어 비난하고 있었다. 나는 해인사에 들러 유네스코(UNESCO)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팔만대장경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도올은 그의 강해의 저본으로 구마라집의 역본을 주종으로 삼고 다른 역본과 비교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금강경의 가장 정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해인사의 고려팔만대장경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보급된 금강경이 이 고려대장경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개탄하고 있다. 도올의 주장이 정확한지 아닌지를 가릴 실력이 없는 나는, 그 내용의 정확함은 물론 활자의 늠름하고 정교함에 있어서 세계 으뜸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고려대장경의 판본을 이번 여행에서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었다.
삼십여 년 만에 다시 찾은 해인사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약간 소란스러울 뿐 내 기억 속의 한적한 산사(山寺)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경판고(經板庫)만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건물을 새로 지은 듯 회(灰)벽은 말끔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나무 칸살을 벽에 넣었으며 판가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경판이 꽂혀 있고 출입문이 잠기어 있었다.(예전에는 문지방이 높을 뿐, 문도 없이 드나들 수 있었던 곳으로 기억되는데) 경판의 보존을 위해 세인의 출핍을 막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가까이서 경판을 보고 직접 확인하려던 기대가 깨진 것이 아쉬웠다. 칸살 사이로 기웃거리며 들여다보기는 했으나 이제 해인사 아닌 다른 곳에서 저 경판을 보았을 때 빨래판으로 보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서지 않아서 아직도 부끄러웠다.
조용히 하라는 주의를 들으면서도 계속 재잘되는 학생들 속에 끼어 경판고 옆 건물로 들어갔다. 기념품을 파는 곳인 듯한데 문 위로 걸려 있는 사진틀 속의 글이 내 눈을 끌었다. 고려시대의 문신 이규보가 쓴 '대장경 각판 군신 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祺告文)'이었다. 임금(고종)과 문무백관이 목욕 재계하고 모여서, 몽고인의 환난으로 인해 부인사(대구)에 소장되었던 초조대장경 판본이 불에 타버렸음을 하늘에 알리며, 다시 대장경을 판각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청원하는 것으로 기고문은 시작되었다.
고려 조정의 나약(懦弱)과 순진함과 안이함이 이 정도이었음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고한 백성이 오랑캐의 칼에 죽고 나라의 보물이 다 불타버리는 이 절박한 시기에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람들의 안목과 결의가 이 정도인가. 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할 대책에 앞서 불법의 판각을 위한 대역사를 펼친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타당치 못한 일이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즉 나라를 외세에서 지키는 데, 즉 나라를 외세에서 지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힘을 기르는 것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인력과 재력의 부차적인 목적에 쓰여짐으로써 국력의 축적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난이 평정된 뒤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전쟁 중에 서둘러 시작하는 임금과 신하들의 속셈이 환히 들여다 보였다.
그러나 한편, 국가 존망의 위협 앞에서 속수무책인 군신의 곤경 또한 간과할 수 없어 착잡한 마음으로 계속 글을 읽던 나는 글 중간쯤에 와서 이 구절을 보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법(經法)은 본래부터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을 것 아니옵고, 경법에 담겨 있는 것은 물질적 기계(器界)이오니, 기계가 이룩되고 망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로서 망가지면 다시 만드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옵나이다. 하물며 나라를 지니고 집을 가진 이로서 불법을 받드는 것은 본래 미적미적할 것이 아니온데 이미 이 큰 보배가 없어졌사온즉 공사의 거창할 것을 염려하여 다시 만듦을 어찌 등한히 하오리까. 그리하여 지금 대소재상과 문무 백관들과 함께 큰 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을 두어 한편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나이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지관 스님 한글 번역본)
같은 구절을 되풀이하여 읽는 사이 조금 전의 불만과 비난은 서서히 잦아들고 그 대신 고려인의 이지적인 사고와 늠름한 기상이 신선한 충격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그것이 담겨 있는 경판이나 책이 타고 썩어 없어진다 하여서 없어지지도 손상되지도 않는다. 없어지고 손상되는 것은 우리가 만든 그릇이고, 그 그릇이 헐고 깨지고 없어지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들 믿음의 상징이요, 오랜 정성의 결집인 대장경 결판까지도 이 자연의 법칙에서 어긋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는 그러나 용기와 확신이 필요하다. 사람이 만든 것은 그것이 비록 불상이라 하더라도 신성시하지 않으려는 知的 용기와 어떠한 외부의 힘도 부처님의 가르치심 자체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킬 수 없다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다.
그런데 또 한번 놀랄 일이 기고문의 뒷부분에 있었다. 기고문의 저자는 현종2년(1011년) 초판대장경 판각의 경위와 그 위력을 설명하고 난 뒤에 (그 때는 판각이 끝나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다고 한다), 반은 어리광처럼, 반은 위협처럼, 반은 사탕발림의 꼬임처럼, 부처님의 변함없는 가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하온즉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대장경이요, 판에 새기는 것도 다를 바 없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발원함도 또한 바를 바 없사오니, 그 때의 거란병은 물러갔아온대 오늘의 몽고병인들 어찌 물러가지 아니하오리까. 다만 모든 부처님과 여러 하늘의 살피시기에 달렸으리라 하나이다.
저희들의 오늘날 정성이 그 때 군신들의 정성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모든 부처님과 성현과 33천께서 저희들의 지극한 소원을 살피시고 신통한 묘력을 내리시사, 저 모진 오랑캐로 하여금 더러운 발꿈치를 돌려 멀리 달아나게 하고, 다시는 우리의 국경을 침범치 못하게 하여지이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지관 스님 한글 번역본)
지난 번에도 사정을 봐줬으니 이번에도 꼭 좀 들어달라고 조르는 빚쟁이처럼 고려인들은 부처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응석을 떠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팔만대장경 경판으로 직접 찍은 반야심경 한 장을 해인사 참배 기념으로 사들고 절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