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로운 구름 공중에 어리니 그 영험함 가히 알지어다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안성 서운산(瑞雲山) 석남사(石南寺)

2007-10-04     관리자


안성 땅 칠현산(칠장산, 516m)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내달려온 한남금북정맥이 각각 한강과 금강이라는 큰 강을 좇아 제 이름길을 내딛는 곳. 한남정맥은 곧 수원 광교산, 김포 문수산으로 줄달음치고 금북정맥은 안성 서운산, 천안 광덕산으로 굼틀거리며 청양 일월산, 예산 덕숭산을 넘어 그 몸을 서해로 떨어뜨린다.
지도를 펼 때 한강 아래 중부권을 남북으로 나누는 산줄기, 즉 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름하는 산들이 바로 한남금북정맥과 금북정맥의 높은 산들이다. 오래 전 『사회과부도』에서 보았던 이름 ‘차령산맥(車領山脈)’이 순간 떠오르는데 천안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금북정맥의 한 고개가 바로 차령(車領)이니 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걸음을 디뎌보면 속리산을 거치지 않고 백두대간의 한 마루금에서 그려져 나온 차령산맥의 산과 산들이 강을 건너 어떻게 닿아 있는지 도무지 좇을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지도를 따라가든 직접 그 산 아래 서든 어느 것이 실제로 우리의 몸과 맘에 더욱 와닿는지 명확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차령산맥이 100년 전 일본인 지질학자가 그려놓은 것일진대 더 말해 무엇하랴. 수백 년 쌓이고 쌓여 새겨진 이름 금북정맥이 더욱 소중한 까닭이다.
서운산은 금북정맥의 첫머리에 해당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에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하면 비를 빌어 응답이 있는 곳으로 경기도에는 적성(積成)의 용지(龍池)·용두산(龍頭山), 안성(安城)의 서운산(瑞雲山)”이라 하였으니 예로부터 나라와 백성들이 영험한 곳으로 섬겨왔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와 충청남북도가 머리를 맞대고 앉은 산, 지리·덕유처럼 크고 높지 않되 대간의 산처럼 삼도에 그 몸을 허락한 산. 그래서 토성을 쌓을 만큼 백제시대 군사요충지로 주목을 받아온 산, 서운산이다. 이제는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음성군 서북쪽 백운산(460m)의 옛 이름 또한 서운산이라 하였다 하니 그 산이 차지하던 드넓음을 알 만하다.
그 곳에는 또 사시사철 어느 때나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그 장관으로 인해 산 밑에 사는 사람이나 몇 십리 밖에 사는 이 모두 명산으로 여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야기 속, 서운산의 복됨을 깨달은 칠장사의 한 도승이 지었다는 서운암은 예불 공양하면 소원성취 안 되는 것이 없는 절로 불제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길 없어 잊혀져가는 전설처럼 아쉽기만 하다.
서운산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 담화 덕사(曇華德師) 또는 석선(奭善)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안성군지(1990)』에는 석남사의 고승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절의 창건에 관하여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하루아침에 먼 곳으로부터 이상한 기운이 남쪽에 결집되어 어리어서 흩어지지 않음을 발견하고 바라던 마음가짐으로 그곳을 찾아 이른 즉 이때 백제의 북쪽에 상서로운 구름이 공중에 어리고 흰 무지개가 산성을 둘러 있으며 금빛이 땅 위에 솟아나고 옥석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데 인하여 역사를 시작한 지 삼년 만에 절을 완성하니, 때는 신라 문무왕 27년이라.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모이고 국왕과 대신들이 흠모하고 공경하며 불도에 귀의하고 절의 액호를 써서 내려 주며 백성군 금광면 서운산 석남사라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673년이 되었다.”
석남사가 서역의 고승 담화 덕사에 의해 창건되고 당시 상서로운 기운과 옥석이 흩어져 있음에 ‘서운산 석남사’라 이름하고 687년 절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겨울 끝, 서운산을 오르며 바라본 석남사의 풍광 속, 절 뒤로 솟아 오른 큼직한 바위며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돌들이 눈길을 사로잡더니 그 옛날 석남사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된 것일 줄이야.
이후 857년에 이르러 수원 용주사의 옛절인 갈양사를 창건하고 머물던 염거 화상(廉居和尙)이 꿈과 호랑이의 인도로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고 954년에는 혜거 국사(惠居國師)가 다시금 절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최근 쓰여진 「석남사 사적명」에는 고려 원종 6년(1265) 태원(泰圓) 선사의 중창 후 조선 태종 7년(1407) 자복사원(資福寺院)이 되어 지역의 수사찰이 되고, 세조 임금 때(1457) 교지를 받고 석남사 스님들의 부역이 면케 되어 수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선조 13년(1580)에는 금 40근을 넣어 만든 200근의 무게의 금동범종이 하사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도 보이는 이 같은 사실은 억불숭유로 알려진 조선시대 속에서도 석남사가 안성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전국적인 거대 사찰로 지켜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의미 있게 읽힌다.
앞의 사적명에는 또 인조 27년(1649)부터 십여 년간에 걸쳐 해원(海源) 선사가 영산전과 요사를 중건하고 영조 11년(1735)에 화덕(華德) 화상이, 철종 8년(1857)년에 원명(圓明) 선사가 중창을 거듭했음을 적고 있다.
서운산에 포근하게 안긴 석남사는 현재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과 영산전(보물 제823호), 중심당, 요사, 해우소 그리고 단청을 앞둔 금광루(金光樓)의 단출한 모습을 갖고 있다. 얼마 전까지 경내 이곳 저곳에 지어져 있던 가건물을 정무 큰스님(불광 97년 4월호 소개)이 오시면서 절답게 정리해놓은 것이다.
전화를 통해 하루 묵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쭙자 하루도 좋고 한 달도 좋다며 언제든 찾아오라며 인심 좋게 웃으시던 스님. 절보다도 스님을 뵙고 싶어 어서 찾아가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차를 앞에 두고 앉으니 요 근래 다녀오신 인도 이야기며 사진을 거리낌없이 풀어놓으신다. 꼭 한번 인도를 방문해보라고 일러주시는 자상한 말씀에 허둥대던 마음이 촉촉히 젖어든다. 크지 않은 법체임에도 항상 허리를 곧추 세우고 단정히 앉으신 모습에서 큰스님의 모습이 그대로 다가온다.
청량한 새벽예불을 마치고 높다랗게 자리한 대웅전에 올라 부처님께 문안인사를 여쭙는다. 수줍게 웃으시는 부처님 머리 위로 작은 나뭇조각을 수없이 꿰어 맞춘 듯한 정교한 닫집이 둘러 있어 감탄이 터지는데 그 옆 움푹 휘어들어간 아름드리 나무를 그대로 올려 들보로 쓴 솜씨며 아름다운 모양에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한다.
밝아오는 빛깔에 맞춰 서운산을 오른다. 투명한 계곡물을 따라 오르니 발걸음은 어느새 마애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른다. 두툼한 광배로 참배객을 환하게 맞는 부처님께 다시 한번 절을 올리고 산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군데군데 남아 있는 눈길을 조심스럽게 올랐는데도 불과 3,40분만에 산 마루금에 닿는다. 첩첩이 이어진 야트막한 산들이 눈 앞이다. 칠장산으로 속리산으로 가 닿는 산들일게다. 깊고 깊은 산중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 경치가 한동안 마음을 빼앗아 달아난다.
마루금 울창한 소나무 사잇길에는 아직도 발목이 빠질 만큼 눈이 남아 있다. 그래도 따사로운 봄햇살을 견딜 수 없는지 얼어붙은 눈이 조금씩 녹아 흐른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남녘에서 올라오는 꽃소식에 봄맞이 준비가 한창이다. 석남사 대웅전 오르는 영산홍 꽃길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새봄을 맞는 석남사로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