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25.간다라국의 수도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25

2007-10-04     김규현

고대 유적지, 탁시라에서 페샤와르는 반나절 거리다. 그러므로 모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이 유서 깊은 옛길(알렉산더가 지나왔고, 현장 법사를 비롯한 수많은 구법승들 그리고 우리의 혜초가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을 제법 여유를 즐기며 마음 머무는 대로 잠깐씩 쉬면서,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페샤와르는 간다라(建馱羅國)국의 찬란했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2천년간 알렉산더가 물러간 뒤의 통일왕조인 마우리아왕조의 요충도시였고, 그 뒤를 이은 쿠샨왕조의 카니시카(Kaniska) 왕이 도읍지로 삼아 간다라문화의 황금기를 맞은 곳이었다. 비록, 그 후 이슬람이 이 지방을 석권하여 현재까지 온통 ‘꾸란’의 독송소리만 가득한 곳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페샤와르는 대도시로서,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국제교통로로서, 서쪽으로는 로마로, 동으로는 인도로, 북으로는 파밀고원을 넘어서 중앙아시아 또는 중국으로 통하는 십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

간다라문화의 쇠퇴는 혜초가 왔을 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지, 그는 쿠샨왕조가 기울었고 불교 또한 와해되기 시작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카슈미르국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어 한 달쯤 가면 간다라국에 이른다. 왕과 군사들은 모두 돌궐인이고 토착인은 호족(胡族)이며 바라문(婆羅門)도 있다. 이 나라는 전에 계빈(距賓) 왕의 통치를 받았으나 돌궐왕이 한 부락의 병마를 거느리고 계빈 왕에게 투항하였다가 후에 돌궐의 군대가 강해지자 곧 계빈왕을 죽이고 스스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 나라 영토에서는 돌궐 왕이 패왕이 되었고, 이보다 북쪽에 있는 나라도 그 지배를 받았다. 산이 메말라서 풀이나 나무가 없다. 의복과 풍속과 언어와 기후는 모두 다르다. 옷은 가죽과 털과 모직물로 만든 것과 가죽신과 바지를 입는다. 토지는 보리와 밀이 잘 되고 기장이나 조와 벼는 전혀 없다. 주민들은 대개 보릿가루와 떡을 먹는다.”

여기서 계빈국은 아프칸을, 돌궐은 투르쿠를 의미하고 보리가루와 떡은 현재 그들의 주식인 ‘쨔파티’를 의미하는 듯하다.

또한 현장도 이 나라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간다라국(建陀羅國)은 동서가 1천여 리 남북 8백여 리이며 동은 인더스 강을 바라보고 있다. 나라의 대도성은 주위가 40여 리이다. 왕족은 후사가 끊겨 카피시국에 예속되어 있다. (중략) 예로부터 이 곳에는 학자가 많아서, 무착(無着)·세친(世親)·여의(如意)·중현(衆賢), 협(協)존자 등이 태어난 곳이다. 가람은 1천여 곳 있으나 부서져 황량하고 많은 탑도 파괴되었다.”

현장의 기록 중에는 친근한 이름이 많이 나타난다. 바로 대승불교의 이론적 틀을 잡은 쟁쟁한 논사들이다. 무착(Asanga)과 세친(Vasubandhu)은 형제 사이로, 각기 유명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구사론(俱舍論)』의 저자이며 중현(衆賢, Sangabhadra)은 『순정이론(順正理論)』을, 여의(如意, Manorath- a)는 『비바사론(毗婆沙論)』을 각기 저작한 학승들이다. 이들이 모두 페샤와르 출신들이라는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서역 최고의 스투파, ‘작리탑(雀離塔)’

이쯤 되니 ‘해동의 나그네’가 어찌 욕심이 안 생길 것인가? 해서 정보수집에 편리한 구시가에 숙소를 잡아놓고 그들이 그런 대작을 저술했던 ‘명작의 고향’ 찾기에 들어갔다. 그 곳은 바로 ‘카니시카 대탑’이었다.

이 탑에 대하여는 혜초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성은 인더스를 굽어보는 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에서 서쪽으로 3일 거리에 큰 절이 하나 있는데, 천친(天親)과 무착보살(無着)이 살던 절로 이름은 카니시카(葛諾歌)이다. 절에는 하나의 큰 탑이 있는데 항상 큰 빛을 발한다. 이 절과 탑은 옛날에 카니시카왕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왕의 이름을 따라 절 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한 현장도 ‘명작들의 산실’에 대하여, “세 번째의 중각에는 협존자(脇尊者)의 방이 있다. 오래 전 파괴되었으나 지금도 알려져 있다. 존자는 처음에는 바라문의 스승이었으나 나이 80에 집을 버리고 옷을 물들여 출가했다. 협존자의 방 동쪽에 낡은 방이 있다. 세친(世親)이 여기서 『구사론(俱舍論)』을 저작했다. 보살을 존경하는 자가 방을 봉하여 이 유래를 쓰고 있다. (중략) 세친의 방에서 남쪽으로 50여 보에 제2의 중각이 있다. 여의존자 논사가 여기서 『비바사론(毗婆沙論)』을 저작했다.”

또한 이른바 ‘4대 입축구법기(入竺求法記)’ 이외의 또 다른 자료인 혜생(惠生)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도 “13층의 카니시카왕의 작리탑(雀離塔)은 서역 최고의 탑”이라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광(正光) 원년(520), 4월 중순에 건타라국에 들어갔다. (중략) 다시 서남쪽으로 60리를 가서 성에 이르렀다. 동남쪽으로 7리를 가면 ‘작리탑’이 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여래가 이 세상에서 제자와 함께 다니며 교화를 펼칠 때 성의 동쪽을 가리키며 ‘내가 열반한 후에 카니시카라는 이름의 국왕이 이 곳에 탑을 세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부처가 열반하니 2백년 후에 과연 같은 이름의 국왕이 출현하였다. 그가 성의 동쪽을 유람하다가 아이 4명이 소똥으로 3척 높이의 탑을 쌓는 것을 보았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없어져 버렸다. 왕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곧 탑을 세웠다. (중략) 작리탑이 세워진 이래로 세 차례나 큰 화재가 나서 왕이 원래대로 복원하였다. 나이 든 노인들이 ‘이 탑에 불이 일곱 번째 나면 불법도 당연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탑 안의 장식물들은 모두 금과 옥으로 만들었는데 각양각색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아침해가 떠오르면 금반(金盤)은 밝게 빛나고 미풍이 불어오면 보탁(寶鐸)도 함께 울렸다.

서역의 탑 가운데 최고였다. 이 탑을 처음 세울 때 진주로 망을 만들어 탑 위에 덮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왕은 진주망이 만금의 값어치가 되니 자신이 죽은 후 다른 사람이 빼앗아갈 것이 두렵고, 또 탑이 파괴되면 수리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염려하여 망을 벗겨 구리가마솥에 담아 탑에서 서북으로 1백 보 떨어진 땅에 묻었다. 그 위에 보리수를 심었는데 가지는 사방으로 뻗고 잎이 무성하여 하늘을 가렸다. 나무 아래 높이 1장 5척 되는 좌불상이 4개 있고, 용 4마리가 진주망을 항상 지키고 있어 만약 훔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자가 있으면 곧 재난이 일어났다. 돌에 새긴 명문에는 ‘후세 사람에게 이르나니 만약 이 탑이 무너지면 고생스럽더라도 뒷날의 현자가 이 진주 망을 꺼내 수리하라.’고 씌어 있었다.”

이렇게, 이 작리탑의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혜초, 현장, 혜생이 이구동성으로 찬미하고 있으나, 그러나 어찌하랴. 천년의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을….

며칠 간 동분서주한 보람도 없이, “페샤와르 동남7리(혹, 동4리)에 있다.”던 목탑(木塔)의 원조로 꼽히는 이 기념비적인 탑은 현재 다른 건물이 들어선 터만이 확인될 정도뿐이었고, 그 전설의 ‘진주망’은 실제로 발굴되어 무굴황제 후궁들의 치장감이 되었다는 민담만이 전해오고 있다.

다만 현재 폐샤와르 박물관에 그 탑의 장식물들이 몇 개 보존되고 있어서 이 탑의 실체 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나마 사진 촬영까지 금지당해 섭섭함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