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세상 만들기

우리스님/ 강화도 무애원 설봉 스님

2007-10-04     관리자


불연(佛緣) 때문인지 강화도 하면 보문사, 전등사 등 옛 절이 떠올랐는데, 요즈음엔 무애원 설봉 스님이 먼저 생각난다. 어린이포교의 선구자로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신 스님을 생각하면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지난 10여 년 전부터 강화도 화점면 부근리에 터잡고 도자기를 구우며 청소년 인성교육과 아울러 군포교에 온 힘을 기울이고 계신 스님을 뵙기 위해 강화도로 향했다. 초행길인데도 아무런 장애 없이 쉽게 찾을 수 있었다.(인근 마을 사람에게 자세한 길 안내를 받으면서 무애원의 유명세를 짐작했다.)

제 몸을 태워 밝히는 촛불처럼…
스님은 도자기를 굽고 계셨다. 실내공기가 너무 차가웠는데 순간적으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포교를 위해서 밤새워 작업한 기금을 온통 포교기금으로 지원하면서도 당신은 정작 기름 값을 아끼기 위해 보일러도 틀지 않고 지내시는 것을 뵈니 불현듯 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스님은 늘 어둡고 외롭고 힘든 곳만 찾아다니셨다. 모 영화사 연출부에서 일하다가 홀연히 영화 주인공처럼 출가, 경남 은하사에서 몇 년간 참선 수행을 하다가 저자거리로 내려왔다. 달동네 판자촌에 둥지를 튼 스님은 기거하던 단칸방을 개방하여 부모가 일하러 간 동안 외롭고 쓸쓸하게 빈집을 지키던 동네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그 집안 사정을 훤히 알게 되었다. 간식거리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의 학비며, 학용품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자주 탁발을 나갔다. 출가 전 경험을 살려 건물의 실내장식을 해 주기도 하고 상가집에 가서 시달림도 했다. 자연스레 어린이법회를 열게 되고, 어린이들로 이루어진 사물놀이패도 구성하고, 군부대 위문공연을 여러 차례 펼쳤다.
70년대 어린이 포교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던 그 즈음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뜻있는 어른들이 동참하기 시작, 얼마 후 신길6동의 한 건물에 무애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한 불자가 가마터를 소개하더군요.”
탁발에 의지하기보다 도자기를 구워서 파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 좀더 많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님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은 빛을 발했다. 전통 도예를 재현하면서도 현대적인 색채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스님의 도자기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전시회는 성황이었고, 그 기금은 고스란히 어린이포교로, 불우청소년들의 장학금으로 쓰여졌다.

봄꽃보다 아름다운 산타 스님의 군인포교 원력
“어린이들은 부모들이 울타리가 되어 주지만 군인들은 다릅니다. 자유분방하게 살던 젊은이들이 부모 형제 떠나 반감금사회라고 할 수 있는 군에 입대하는 순간부터 강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지요. 군포교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요즘엔 군포교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만난 종교가 그 사람의 일생까지도 좌우하기에 군대를 포교의 황금어장이라 하지 않던 가. 하지만 군포교의 현실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스님은 십년 전 군포교에 온 힘을 기울이기 위해 최전방인 이곳 강화로 작업장을 옮겼다. 무애원에서 일요일에는 정기법회(강화도 전역에서 법회를 보러 오는 군인들 이삼 백 명에게 벌써 십년 째 점심공양을 제공하고 있다. 가끔 대중공양 들어올 때가 가장 반갑다고 한다.)를 열고, 해마다 여름이면 ‘이병의 날’을 만들어 수백 명의 해병대원들에게 몸과 마음을 쉬면서 도자기를 만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 전국 학생 댄싱그룹 초청, 연예인 초청 공연 등 1년에 한 차례씩 군인들을 위한 정기 공연이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다.
한편 김포 강화의 2사단뿐만 아니라 서해안의 외딴 섬을 찾아다니며 군인들의 외로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따뜻한 먹거리를 전해주어 ‘아버지 스님’‘산타 스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외롭고 불안하고 힘들 때 위로해준 종교를, 스님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무애원에는 제대한 군인들과 그 부모들이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그래서 수요일날은 아예 ‘상담의 날’로 정해놓았다.
“빈다고 편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도 불행도 나한테 달려 있다. 스스로 갈고 닦고 배우고 노력해서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스님은 군인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이게끔 얘기해주는 것이 관건이고, 무엇보다 법회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어머니벌 되는 불자들이 찾아와 ‘군에 와서 참 고생하네’ 하며 등 한번 두들겨주는 것이 수십 번 설법하는 것보다 낫다며 말 한 마디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정을 느끼게 되고 규율적이고 위압적인 군대생활의 스트레스가 싹 가시게 될 것이라며 일반 불자들의 군포교 동참을 간곡히 권한다.
“불교계의 미래가 군포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찰마다 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는 등 군포교에 힘쓴다면 불교의 미래가 밝아질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승가대학의 젊은 학인스님들이 일요법회를 맡아줘서 참으로 고맙고 희망을 느낍니다. 그 스님들 덕에 오지의 소외된 군부대를 찾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한편 습지대로 버려져 있던 무애원 인근의 군용지에 사비로 흙을 붓고 터를 닦아 군법당을 지어 요즘에는 그 곳에서 법회를 보고 있다. 따뜻하게 이백 명 이상 법회 보고 공양할 수 있는 법당과 60평 식당, 자유롭게 탁구 치고 신문 보고 바둑 둘 수 있도록 시설해 놓은 30평 휴게실(군종교시설로서 이와 같은 체육시설을 갖춘 곳은 전국에서 유일한 모범 케이스), 2,00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널따란 앞마당과 마당 한켠의 농구대가 인상적인 군법당 기룡사는 스님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것이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는데 경제적으로 힘에 부쳐 세면장과 화장실, 창고는 터만 닦아놓고 아직 짓지 못했다는 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나한테 전시회를 너무 자주 한다고, 생활도자기까지 만들어 판다고 손가락질하기도 하는데, 군포교를 위해서라면 욕을 먹는 것도 즐겁습니다.”
불자들의 시주돈에 의지하지 않고 포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스님을 향해 욕하다니 세상 인심이 야속했다. ‘무애원 찻잔 하나라도 사주는 사람이 군포교에 동참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망정 어떻게…
건강한 세상 맑고 밝은 세상을 위하여
“힘든 곳, 외로운 곳을 찾아가 소리 없이 실천하는 도량으로 불광사가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 불광 같은 신행단체, 군인포교에 관심을 가지는 불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스님은 고(故) 광덕 스님과 불광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불자들 스스로 일거수 일투족이 불공이 될 수 있도록 맑고 밝은 신행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 병든 세상을 치유하며,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가 먼저 건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우리는 너무 작은 방생에만 치우쳐 있는데, 이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동참하는 것보다 큰 방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건강하게 하고, 내 주위부터 밝히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실천하는 게 진정한 의미의 방생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어린이포교, 군인포교로 인간 방생을 실천해온 스님의 마음을 맑히고 자연을 살리는 환경 방생 이야기 또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스님은 아이들, 청년 학생들과 함께 틀채, 갈쿠리, 장화, 무공해 비누 등을 준비하여 방생 장소로 떠난다.
“강물에 들어가서 촛조각과 과일 조각을 건져내고 무공해 비누로 돌 그을린 것 닦고, 백사장에 널려 있는 담배조각, 유리조각 따위를 줍고나면 보름달이 뜰 때쯤 됩니다. 서로 마주 서서 웃고 있는 아이들 얼굴이 보름달보다 더 환합니다. 청소한 뒤 그 자리에 서서 법회를 보고 지신밟기식으로 ‘올해도 이 해변을 찾는 사람 건강하게 피서할 수 있도록 기원하고, 이 혼탁한 세상을 정화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발원하면서 관음정근을 하며 백사장을 돕니다.”
스님은 아이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살리는 방생에 동참해서 맑고 건강하게 살아가길,자연을 살리는 것이 이 우주를 살리는 것임을 깨닫기를 기원 또 기원한다.
“세상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맑고 밝은 마음의 파장을 보내는 것도 방생이요,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 하나 줍는 것도 방생입니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면서 포교하는 스님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다. 피로가 쌓일텐데 어떻게 견디냐는 물음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면 피곤하지 않다, 10년만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미소짓는 스님께 “스님, 고맙습니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쉬운 마음으로 무애원을 나서는데, “내 삶이야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고 부귀를 위한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심부름꾼 노릇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인터뷰 도중 하신 말씀이 귓전을 울렸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화두가 타파되는 듯 가슴이 환해졌다.설봉 스님은 1971년 출가, 1973년 3월 12일 목공예개인전, 1978년 전통공예전(목공예 특선), 1981 불우청소년돕기 목공예 개인전, 1973년 서각 개인전, 1975년 불우청소년 돕기 도예전, 1978년 어린이법당기금마련 도예전, 1979년 세종문화회관 초청전, 1980년 전국민속공예대전 대상, 경인지역 민속공예대전 은상, 1981년 불교방송 포교사업기금마련, 1982년 강화군 문예회관(불우청소년 돕기 도예전), 1983년 다보성 갤러리(대불련 기금 마련 도예전), 부산 KBS 방송국 공간(소년소녀 가장 돕기 개인전), 1984년 전통공예대전 금상, 국군 포교 기금 마련 개인전, 불기 1985년 대구시민회관 전시실(불교방송 기금마련 개인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전시실(청소년회관 건립기금마련 도예전), 광주은행본점 광은갤러리(군포교 기금마련 도예전), 불기 1988년 잠실롯데백화점 롯데화랑(연수원 건립 기금마련 도예전), 1989년 서울클럽 한라산홀 (청소년 전통문화 연수원 건립 기금마련 도예전), 미국 시카고 국제 도예전 출품, 대구동아쇼핑센터 전시관(연수원 건립 기금마련 도자기 전시회) 등 수많은 전시회를 통해 기금을 마련 포교에 심혈을 기울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