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24.또 하나의 알렉산드리아, 탁시라

신 왕오 천축국전 별곡 24

2007-10-04     김규현

고대 유적의 보고(寶庫) 탁시라(Taxila)

우리의 혜초는 북인도를 떠나 서쪽으로 향해 걸음을 옮긴 다음,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란달라국(北印度)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걸으면 ‘탁살국(社國)’에 이른다. 북천축국과 언어가 조금 다르나 의복, 풍속, 산물, 기후는 모두 비슷하다. 여기도 절과 승려가 많고 또한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공경한다.”

혜초는 파미르를 넘기 전에 이곳을 지나갔지만 그 전 현장 법사는 파미르를 넘어 천축으로 오는 길에 들러 또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탁샤실라국(鵝叉始羅國)은 주위가 2천여 리이며 나라의 대도성은 주위 10여 리이다. 호족들이 겨루고 있고, 왕족은 후사가 끊겼다. 전에는 카피시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최근에는 카시미르국에 예속되어 있다. 땅이 기름져서 농업이 성하다. 샘과 시내가 많고 꽃과 과일이 풍성하고 기후는 온화하며 사람들은 몸이 날렵하고 용감하며 삼보를 마음으로 존경한다. 가람은 많으나 이미 황폐해져 승도는 적고 모두 대승을 학습하고 있다.

당시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이 곳은, 남아 있는 유적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록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위 기록 중의 ‘탁살국’이나 ‘탁샤실라국’은 바로 현재의 파키스탄의 탁시라를 말한다.
‘해동의 나그네’는 라호르박물관의 고행상 앞에 언제까지나 앉아서 그 의미를 곱씹어보고 싶었으나, 우리의 혜초 사문은 벌써 저만치나 앞서가고 있었기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달래 그를 따라가야만 했다. 그래서, 밤기차를 타고 280km를 달려 이스람아바드(Islamabad)에 도착했다. 현재 이 도시는 다만 파키스탄의 행정수도라는 상징성만 있을 뿐 나그네에겐 별 의미가 없는지라 정거장에서 바로 페샤와르(Peshawar)행 차를 잡아타고 중간에 있는 고도(古都) 탁시라로 향했다.
알려진 대로 이 지방은 간다라문화의 중심지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간다라풍의 귀중한 유적들이 박물관뿐만 아니라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글자 그대로“즐비(櫛比)하다.”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온통 유서 깊은 유적지 천지였다. 그것도 기원 전후를 넘나드는 고대 유적들이 그야말로 지천이었다.
B·C 326년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 원정에 나서 대제국 페르시아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다리우스황제를 추격하면서 그 여세로 박트리아, 간다라 등을 거쳐 당시 인도 땅이었던 탁시라까지 함락시켰다. 그리고 정복지마다 그리스 민족을 이주시켰다. 이른바 여러 개의 동방의 ‘알렉산드리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동서양에 걸친 이런 대제국을 성취한 그는 귀환 도중에 병사를 하게 되지만 그가 이주시킨 그리스 이민들은 그 뒤로도 곳곳에 정착하여 2백년간 그리스풍의 왕조를 지탱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문화가 - 즉 그리스의 헬레니즘(Helenism)과 동방문화가 융합된 것이 - 바로 ‘간다라(Gandhara)풍’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동서문화가 결합한 특이한 문화는 후에 아쇼카 왕으로 대표되는 마우리아(Mauria) 왕조의 뒤를 이어 북인도를 평정하고 거대한 불교왕국을 이룩한 카니쉬카(Kanishika ) 왕의 쿠샨 왕조(Kushan)가 대를 이어 다시 꽃을 피웠다.
이렇게 여러 민족과 왕조가 명멸했던 역사 속에서 탁시라는 바로 그 가운데서 찬란한 빛을 발했고, 그리고 그 흔적들은 온전하게 남아 지금까지 지상과 지하에서 숨을 쉬면서 가끔씩, 유한한 삶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영원한 그 무엇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쿠날라(Kunala) 태자의 전설이 서린 스투파

탁시라는 전 지역이 모두 의미 있는 유적지들이어서 이 방면에 관심 있는 나그네라면 도저히 겉핥기라도 하루에는 모두 돌아볼 수는 없다. 몇 년 전에 시간에 쫓겨 그렇게 바람처럼 스쳐간 다음 그 후 많은 후회를 한지라 이번에는 박물관 옆의 고풍스런 숙소에 아예 짐을 내려놓고 간단한 요깃거리와 물병만 든 채 답사에 나섰다.
물론 가장 유명한 볼거리인 고대 시가지인 시르캡(Sirkap)이나 다마라지카(Dhamarajika) 대탑도 꼭 들러야 할 곳이지만 그것보다는 이번에는 반드시 찾아내야 할 곳이 더 있었다. 바로 쿠날라 태자의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곳이었는데 다행히 이곳은 새로 나온 가이드 지도에 선명히 표시되어 있었다. 볼 것 많은 박물관을 뒤로 하고, 우선 그 곳을 어림잡아 가면서 현장의 기록을 머리속에 떠 올렸다.
“성 밖 동남쪽, 남산 북쪽에 높이 1백여 척의 대탑이 있다. 아쇼카 왕의 태자 쿠날라가 계모의 참언에 의해 눈알을 파인 곳인데, 이를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맹인이 기원하면 눈을 뜨게 되는 일이 많다.
이 태자는 정실 황후가 낳은 자식인데 자질이 출중하였지만 모후가 죽은 후 계모는 온갖 참언을 하여 태자를 변경인 탁시라로 보내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다시 후에 계모는 칙명을 위조하여 태자의 두눈을 파게 만들게 하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때 효성이 지극한 태자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부왕의 명을 거스를 수 없다 하며 직접 두 눈을 도려내었다 한다. 맹인이 된 태자는 걸인이 되어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떠돌다가 부왕이 있는 도성에까지 도착하였다. 하루는 부왕이 우연히 누각에 올라 슬픈 곡조의 노래를 듣고는 그 목소리가 태자와 같아서 사람을 보내 태자를 데려오게 하였다. 이에 눈물의 부자 상봉이 이루어졌으나, 그 원인이 계모의 참언에 의한 것임도 밝혀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시 신통한 사문이 있어 소문이 자자했기에 왕은 태자의 눈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중략) 이때 이 사문이 12인연에 대해 설법하니 울지 않은 이 없어서 그릇으로 흐르는 눈물을 받았다. 그리고 스스로 서약하기를 ‘내가 설법한 것은 부처님의 지극한 이치로서,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원컨대 사람들의 눈물로 저 소경의 눈을 씻어 눈이 보이게 해주십시,’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물로써 태자의 눈을 씻었더니 기적처럼 태자의 두눈이 보이게 되었다 한다.”
전설삼매 속에 빠져 한참을 걸어, 고대도시 시르캡 유적지를 통과하여, 야트막한 산언덕을 오르니 정말 현장의 기록대로 그 산정 위에는 전탑(塼塔)으로 보이는 큰 스투파의 기단부분과 넓은 사원터가 널려 있었다. 글자로 이루어진 전설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넓게 트여 가는 시야처럼 해동의 나그네의 가슴도 트여지는 순간이었다.
그 곳에서 눈 아래로 조그마한 연못이 내려다 보였다. 다시 그곳으로 허겁지겁 내려왔다. 그리고 연못둘레를 걸으며 “하나 둘 셋”하고 소리 내어 세어 보았다. 정확히 1백여 걸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신음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꼭 같네.”
“성 서북 70여 리에 엘라파트라 용왕의 못이 있다. 주위는 1백여 보이다. 그 물은 맑고 오색의 연꽃이 함께 피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고장에서는 비를 원하면 사문과 함께 연못가로 와 그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석양을 등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번 순례가 원만하게 회향할 길조인 양, 요즘은 도시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낙타가 두 마리씩이나 나무를 잔뜩 지고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그것을 놓칠 것인가 ! 찰카닥 찰카닥 찰카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