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특집/가볍게 사는 법

2007-10-04     관리자

막 들어선 남산 순환로에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듬성듬성하다. 두서넛이서 재깔거리며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혼자서 속보로 걷는 이도 있다. 마침 노오란 오후볕이 길 좌우의 헐벗은 나무들 사이를 흥건히 적시고 있어서 걷는 이들의 표정이 한결 밝다.
걷는 속도를 조금 느리게 잡은 채 나는 도로의 한 굽이를 돌아서 오르막으로 접어든다. 굳이 따지자면 오르막이라고 해보아야 밋밋한 경사면으로 이루어진 낮은 고갯길이다.
길 양쪽으로는 낯익은 벚나무와 단풍나무들 그리고는 갈참나무 같은 잡목들이 옹기종기 몰려 서 있다. 깊은 겨울답게 나무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헐벗었다. 쥐색 굵은 둥치들과 빈 가지들만으로 간편하게 행색을 꾸리고 섰을 뿐인 것이다. 그런 나무들의 행색을 살피다 보면 길은 어느덧 오르막에서 다시 내리막으로 바뀌어 있다.
할 수 있는 한 느린 걸음을 옮기며 나는 주변의 나무들에서 북서쪽 북한산의 산등성이들을 건너다본다. 그 산등성이들에는 군데군데 불에 덴 흉터처럼 큰 암벽들이 어김없이 드러나 있다. 게다가 그 바위들은 강한 햇볕들을 반사하고 있어 백노지 빛으로 번들거리기조차 한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눈 아래 펼쳐진 시가지 상공에도 그 썩음썩음한 공기들이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팔각정 꼴의 휴게소를 지나면 한동안은 평탄한 길이 계속된다. 나이 들고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치고 나처럼 걷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남산 중턱에 걸린 이 순환도로 위의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예외 없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저처럼 걷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건강 운운의 이야기는 부차적인 것이고 사실 나에게는 걷는 일만큼 즐겁고 행복한 일이 달리 없다. 우선, 걷는 시간에는 번잡한 세속의 일을 다 잊을 수 있어 즐거운 것이다.
간혹 생각에 골몰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직장의 일이거나 이웃간의 다툼의 일이 아니라 삶의 일반에 관한 생각이고 자연에 관한 사색이다. 또 길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번 거듭해서 걷다 보면 ‘우리네 삶의 도정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게 마련이고 일이 험하다 싶으면 뒤이어 평탄한 쉬운 일도 있게 마련인 것을’ 하고 제법 그럴듯한 깨달음에도 이르게 된다.
뿐만이 아니다. 세속의 뭇사람들이 시간을 다투며 빠르게 달리는 속도주의에 취해 있을 때 그 대열을 벗어나 남들이 놓친 자연을 향유하고 마음의 여유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왜 오동나무들이 빠르게 자라서는 주변의 다른 나무들보다 먼저 꺾이고 고사하는가. 철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꽃들의 얼굴 표정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이처럼 자연으로부터 우리가 얻고 누릴 것은 너무나 많다. 또 남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이나 다툼으로 편한 날과 시간이 없을 때에도 그 다툼에서 비록 일시적이지만 멀리 빠져 나와 혼자 자신을 둘러보고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루의 오후 한동안을 남산길 위에서 걷고 주변의 나무와 도심 건너 북한산의 이마들을 마주 보는 일, 그 일 가운데에서 나는 마음의 여유와 정신적인 행복을 이렇게 맛본다.
일찍이 양자거(楊子居)가 노자를 만나서 물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는데 두뇌 회전의 빠르기가 마치 메아리가 그 소리를 쫓아가는 것처럼 빠르고 의지가 굳으며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남다르지요. 이런 사람을 현인들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성인과 비교하자면 잔심부름꾼이거나 기술만 아는 기능공과 같다고 할 것이다. 호랑이와 표범의 현란한 무늬는 사냥꾼들을 들끓게 만들고 동작 빠른 원숭이와 들소를 잡는 개는 제 목사리를 가져오게 만드는 법이다. 이런 자들을 너는 현인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노자는 양자거의 물음에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동작 빠른 원숭이에게 있어 그 민첩함은 하나의 미덕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목에 목사리를 걸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노자의 대답은 그의 평생 지론인 무위(無爲)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얽매임이 없는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다.
노자의 비유대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삶의 목사리들이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들여 일하고 생활하는 나날의 일상만 들여다 보아도 그렇다. 남보다 먼저 달리듯 앞서야 하고,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남보다 조금은 달라야 한다는 등등의 마음 속 숱한 욕망들이 그것이다.
이 욕망들은 끊임없이 사람을 들볶고 못살게 군다. 그야말로 천둥 벌거숭이로 뛰고 달리는 강아지 한 마리를 목사리 하나로 우리가 이리 끌고 저리 끄는 일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욕망을 줄이거나 버리는 일이야말로 사람들 마음에서 강고한 목사리들을 풀어주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그 집안인 영혼 속에서 시작된다. 곧 우리의 영혼 속에 들끓는 욕망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일에서 참자유는 시작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 제어를 가장 이상적인 교양의 형식으로 여겼다.
어떤 일에서든지 ‘무감각’과 ‘과잉’을 극단으로 치고 그 사이의 중용을 바람직한 미덕으로 삼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중용을 가늠하고 또 지킬 줄 아는 것이 자기 제어이고 더 나아가 자유를 누리는 지름길로 알았던 것이다. 자유인은 욕망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산책길의 마지막 구간인 조지훈의 시비 옆을 지나며 나는 마음 속에서 파초 잎에 듣는(滴) 빗소리를 만난다. 대기는 차고 햇볕은 맑지만 그 비석 옆을 지나다 보면 파초의 넓은 잎 위에 떨어지는 요란한 빗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역시 그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일까. 오늘은 허름한 차림새의 중년 남자 한 사람이 비석 앞에 서 있다. 음각으로 파인 시구들을 눈으로 더듬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반환점이 되는 곳에서 발길을 돌린다.
이제 돌아가는 길은 걸음의 속도가 많이 빨라질 것이다. 까닭 모르게 왜 서두르며 또 분주하기만 한 것인지. 어느 곳으로 무엇 때문에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홍수에 휩쓸려 내려가듯 사람들 틈 사이로 떠밀려가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곱씹을지도 모른다. 남산 순환도로 위의 4㎞ 산책길은 어느덧 끝이 난다. 벌써 늦은 오후답게 햇살이 많이 옅어지고 탈색되어 있다.